지금보다 더 마음에 드는 나를 위해 투자하세요.
따님.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경제에 밝지 못하고 그래서 재테크도 못하고 그저 저축해서 모은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형편이다 보니 따님에게 들려줄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지요. 이렇게 아주 전통적인 방식의 경제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보니 따님과 경제니 재테크니 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할(수 있는) 얘기가 없었던 거지요. 신문도 경제 세션을 빼놓고 읽는 제가 따님께 무슨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겠어요. 이런 태도를 갖고도 그럭저럭 먹고사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딱 한 번 '나는 왜 재테크를 못했나' 후회한 적이 있어요. 앞에서 썼듯이 몇 년 전 서울에서 따님이 거주할 공간을 구하러 다녔을 때이지요. 그때 느낀 자괴감이 아직도 지워지지가 않아요. 서울의 집값 문제가 하루 이틀 문제도 아닌데 미리미리 준비하지 못한 제가 너무 부족한 사람으로 느껴졌어요. 이런 사람인지라 따님에게 돈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소비하느냐고 묻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성인이 된 따님에게 이런 관심(혹은 간섭)이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다행히 요즘은 재테크에 대한 정보가 여기저기 차고 넘쳐서 제가 굳이 어설픈 지식을 보태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그래서 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저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타의 재화 혹은 물질적 조건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요. 이를테면 나를 나 스스로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죠(당연한 소리를!). 그러려면 경제적인 독립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고요. 청년 취업이 심각한 시대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따님의 백수생활을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지켜보기도 했지만, 그리고 경제적 독립이 개인의 능력 여하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생각을 좀처럼 철회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문 경제면을 건너뛰는 대신 청년실업과 관련된 기사는 빼놓지 않고 읽으며, 그 문제가 정책으로 어떻게 구현되는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무릇 제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삶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여건은 개선되어야 하니까요.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군요.
따님이 원래 하고 싶어 했던 일과는 다소 동떨어진 직업을 구했을 때 따님의 선택을 격려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일단, 돈을 벌어서 스스로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경제적 조건과 상관없이 오직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매진하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또한 하고 싶은 일을 뒤로하고 사회와(혹은 스스로와) 타협하면서 당장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요. 적당한 삶의 굴욕과 자기기만 속에서도 매일매일 어디론가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 그런 구차한 성실함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수입원이 되는 것이죠. 따님과 저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렇게 숭고하게 번 돈이 월급날 통장을 스치고 빠져나가 버리네요. 마치 나 싫다고 떠나는 매정한 연인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따님은 어디에 가장 많은 지출을 하나요? 제가 따님 나이만 할 때는 어디에 돈을 썼나? 잘 생각이 안 나요. 대학원 학비도 내고, 아마 술값 등 유흥비로 나간 돈도 꽤 있었을 것이고요. 남은 돈을 모아서 결혼자금으로 비축을 해 두었나, 어쨌나 그랬었나 봐요. 분명한 건 돈을 버는 일에도 그것을 소비를 하는 일에도 이렇다 할 목적과 계획이 없었다는 거예요. 언젠가 이런 저에게 재테크에 능한 친구가 충고를 한 적이 있어요. 돈은 목적이 있을 때 더 잘 벌고, 또 모아진다고요. 더 잘 버는 건 모르겠지만 돈의 용도를 분명히 할 때 돈이 모아지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 돈의 용도는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에 대한 투자이겠지요. 이익을 얻기 위하여 어떤 일(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는 것이 투자(네이버 사전에 나와있는 뜻풀이예요)라면 당장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더라도 지금 보다 조금 더 마음에 드는 나를 만들기 위한 투자는 구차한 성실함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에 저는 주로 무엇인가를 배우는 일에 투자를 한 것 같아요. 지금은 주로 건강을 위해 몸에 투자(라면 투자)를 하고 있어요. 달리기가 무릎에 좋지 않다고 해서 지난주에 필라테스를 시작했어요. 따님은 어디에 투자를 하고 계시나요? 그 투자처가 따님의 마음에 드는 믿을만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경제적 자립은 심리적 독립을 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삶의 과업입니다. 내가 애써서 번 돈으로 내 생활을 일구다 보면, 묘한 성취감과 자신감도 따라오지요. 그야말로 누구의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된 나의 영토를 구축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모쪼록 따님이 일군 영토에서 생산과 소비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약간의, 아주 약간의 투자를 해주시겠어요? 젊은 친구들이 가는 힙한 곳에 가서 맛있는 것을 사준다던가 하는 뭐 그런 소소한 소비를 저와 함께 할 의향은 없으신지요.
또 한 친구는 이런 말도 했어요. '은행에 저금한 돈이 내 돈이 아니다. 내가 써야 내 돈이다'. 두 친구의 충고 사이에서 저는 줏대 없이 왔다 갔다 합니다. 역시 이 분야에 대해서는 저에게 배울 게 없다고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