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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29. 2022

대륙의 스케일, 영화의 실사판

  등산의 매력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산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빼놓을 수 없다. 한라산의 백록담, 설악산의 울산 바위, 월출산 통천문 등등... 인터넷에서는 어디선가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산들의 명소가 ‘꼭 한 번 가봐야 하는 명소’라며 저마다의 고운 자태를 뽐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산에서 보는 풍경은 아름답고, 특별하다. 누군가는 어차피 내려올 산을 뭐하러 올라가냐고 묻지만, 산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꽃 이야기가 아니다. 눈높이가 달라지고, 시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강공원에서는 내 키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강이 맞나 싶을 만큼 끝없이 펼쳐진 한강조차 산 정상에 서면 그냥 평범한 하천처럼 보이고, 서울 도심에서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숨이 턱턱 막힐 때 산 정상에서는 도토리 키재기 같다.     


  개인적으로 산에서 만난 풍경들은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물주가 실제로 존재해 정성스레 깎지 않았을까 싶은 기암괴석부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 그리고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거대한 폭포와 절벽 같은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내 생애 두 번째 해외여행이 '자연의 위대함'을 느꼈던 여행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중국 시안행 비행기에 올랐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전국 곳곳의 산을 다녔고, 방학 때마다 여행을 다니면서 국내에서는 웬만한 여행지는 거의 다 가본 우리 가족의 열 번째 여름방학 휴가지였다. 해외여행을 가본 친구들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비행기를 탄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떴다.     


  패키지는 시안에서의 일정과 장가계에서의 일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때까지만(2004년) 해도 중국 관광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때라 장가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진시황의 병마총으로 대표되는 중국 역사의 중심지 시안(장안)만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 책자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볼 수 있다고는 했지만 뭐 아름다워봤자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오로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진시황의 무덤을 발견하면 어떡하지?’와 같은 역사 빠돌이 고등학생다운 망상에 빠져 시안에 대한 기대감만 잔뜩 안고 출발했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진시황릉은 발굴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해서 내가 발견할 일은 절대 없었다.)     


  만리장성으로 대표되는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4번째로 넓은 땅덩어리 덕분에 모든 것의 단위가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상천외한 동물들이 발견돼도 중국이니까 그럴 수 있다며 중국과 관련된 사건·사고들은 흔히 ‘대륙의 스케일’, ‘대륙의 클라스’ 등의 이름으로 국내 커뮤니티에 소개되기도 했다.     


  실제로 만난 시안은 역시 ‘대륙’이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오다가다 자주 보는 서울 도성만 해도 사람 한 명이 겨우 서 있을 수 있을 폭이지만 시안성은 성벽 위에서 자동차가 다니는, 왕복 2차선 도로 수준이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성벽 위를 달리는 마라톤 대회도 열린다고 하는데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진시황이 만들었다는 병마총의 스케일도 남달랐다. 경주에 있는 신라 고분군이 그냥 커피라면, 병마총은 TOP랄까. 심지어 지금 관람객들이 볼 수 있는 병마총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대륙의 스케일이었다.     

  시안 관광을 마치고 장가계로 넘어갔다. 멋모르던 고등학생 때라 장가계가 무협 소설로 치면 장가촌(長家村) 쯤 되는, 장 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 같은 곳이라는 설명만 듣고 시안 옆에 있는 작은 동네겠거니 생각했다. 어디선가 중국에서 장 씨는 한국으로 치면 김 씨, 이 씨만큼 흔한 성씨라 넓은 중국 대륙에 장가촌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 듣긴 했기 때문이다. 막상 알고 보니 장가계는 시안이 있는 섬서성과는 한참 떨어진, 호남성에 있는 유명한 관광지였다. 삼국지로 치면 형주 남부의 무릉 일대리고 했다. 어쩐지 시안 공항에서 중국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넘어가더라니….     


  시안도 대륙의 스케일을 보여주었지만, 직접 만난 장가계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아름다운 지상 낙원의 대명사인 무릉도원의 모티브가 된 동네라고 했는데 문자 그대로였다. 1000m, 2000m가 넘는 바위산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고, 구름이 군데군데 걸려 있어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이 장가계에서 모티브를 땄다고 했는데 실제로 영화 속 판도라는 바위와 산들이 공중에 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기묘한 바위와 울창한 숲은 장가계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반적인 산이라기보다는 기둥처럼 바위가 계곡을 따라 군데군데 솟아 있는 느낌에 가까워서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이동하며 다리를 건너 각각의 바위산을 한 바퀴씩 돌아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높이 올라 가본 것이 63 빌딩 전망대였는데 그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면서 내려다본 풍경은 자연의 위대함 그 자체였다. 문자 그대로 대륙의 스케일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신나서 다리를 건너가 절벽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우와, 신기하다’라는 말만 연발했다. 지금 생각하면 발 한번 헛디디면 수천 미터 아래로 추락해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산꼭대기를 무슨 정신으로 뛰어다녔나 싶다. 그 흔한 펜스 하나 없었는데….     


  하늘 높이 솟은 바위산만큼이나 인상 깊은 것은 동굴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패키지 일정 중에 동굴 관광하는 것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한참을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덜덜덜 하는 모터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는데 눈앞에 선착장이 나타났고, 잠시 후 모터보트가 우리를 태우러 왔다. 동굴 안에 모터보트가 다닐 수 있다니... 역시 대륙의 스케일은 남달랐다.     

 

  아름다운 풍경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도연명은 장가계를 보고 무릉도원이라며 시를 지었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장가계를 배경으로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행성 판도라를 그려냈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마주쳤던 산을 배경으로 지금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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