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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30. 2022

천지는 보지 못했지만

한국 팀이세요?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나타났다. 우리가 한국 팀임을 확인하자 한 사람이 혹시 부족하지 않느냐며, 숫자를 세어보라고 했다. 현지 가이드를 따라 우리는 일렬로 걸어가고 있었고, 맨 뒤에는 한국에서 따라온 가이드가 있었기에 누가 빠졌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가이드는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혹시 모르니 일행의 숫자를 하나둘 세기 시작했다.


아뿔싸. 진짜 1명이 부족했다. 소란의 당사자인 A 씨는 전날 밤새도록 마신 고량주로 인해 계속 복통을 느꼈고, 대열을 이탈해서 대자연의 품 속에서 큰일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독한 안개였다. 일렬로 서서 걸어가고 있었지만, 불과 2,3명을 지난 앞의 사람은 형체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잠시 앞뒤 사람과 거리가 벌어진 사이에 A 씨가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안개도 지독한 가운데, 이정표는 고사하고 그 흔한 줄이나, 계단 심지어 발자국조차 사람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야말로 태초의 자연 속에서 A 씨는 미아가 될 뻔했다. 시원하게 볼 일을 해결한 A 씨가 뒤늦게 우리를 찾고자 목이 터져라 어디 있느냐며, 살려달라며 외쳤지만, 우리는 A 씨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뒤따라오던 다른 한국 팀에서 A 씨를 발견하고 우리 팀에게 인계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재수 없었으면 화장실 한 번 가려다 천지에 빠져 죽는 불상사가 발생할 뻔했다. 그도 아니면, 북한 땅으로 넘어가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거나.


백두산은 그런 산이었다. 1박 2일 백두산 특집이나 김정은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백두산 회담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산이지만, 함부로 민낯을 드러내지 않는 산이었다. 남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려 해발 2744m의 고도에서는 시시각각으로 날씨가 변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중턱에 걸려 있는 구름 위를 걷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구름과 안개 사이로는 푸른 초원과 암벽 지대가 번갈아 나타났고, 때때로 거센 바람이 몰아쳐 옹기종기 모여 스틱을 땅에 박아 넣고 버텨내야 할 때도 있었다.


변화무쌍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산이라 그런지 정말 사람의 손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흔한 공중화장실조차 없어서 공식적인 휴게 시간에 각자 풀숲에 몸을 숨기고 볼 일을 해결하거나, 소변은 아예 조금씩 싸서 말리는 지경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정표나, 등산로, 사람의 발자국 따위가 없으니 잠깐 대열을 이탈했다가 쫓아가는 일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화장실 신호를 일일이 맞춰주다가는 산행이 언제 끝날지 몰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쉴 새 없이 흐르는 땀과 이슬인지 비인지 모를 물방울들로 온몸이 젖어들어서 약간의 지림 따위는 티도 안 났다.


안갯속에서 현지 가이드만 따라 정처 없이 걸었는데, 이정표가 없어 정확히 어떤 코스를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렴풋이 천지를 끼고 몇몇 봉우리를 따라 걸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바로 넘어가 천지라는 가이드의 설명도 들었으나 아쉽게도 천지의 실체는 볼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하는 길도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하산하면서 고도가 낮아져서 그런지 안개는 거의 없었지만,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산꼭대기 좁다란 능선이 우리를 맞이했다. 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제외하면 좌우는 문자 그대로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었다. 발 한 번 헛디디면 그대로 황천길로 직행할 듯했다. 


때마침 우렁찬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폭포 소리였다. 한참 앞서가던 아버지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셨지만, 새벽 3시 30분부터 시작해 10시간이 넘어가는 산행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능선을 벗어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5분 정도 숨을 돌린 후에야 아버지 곁에 다가갈 수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백두폭포가 눈앞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장백폭포라고 부르기도 하고 비룡폭포라고도 부른다는 이 거대한 폭포가 주는 위압감은 난생처음 겪는 느낌이었다. 제주도의 정방 폭포니, 설악산의 토왕성 폭포니 나름 크고 작은 폭포들을 보았지만 ‘시원하다.’, ‘멋지다.’ 정도의 느낌이었을 뿐이다. 백두폭포는... 그야말로 물을 토해내는 느낌이었다. 폭이 좁아서 그렇지, 댐의 수문이 개방되었을 때 물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십 미터를 떨어져내리는 물소리가 만드는 울림이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백두산 종주의 충격은 끝이 아니었다. 산행을 마치고 온천욕을 하며 몸을 씻어내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간 식당에서 놀라운 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식당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갔더니 백두산 천지에 비친 노을 사진이 걸려 있었다. 다큐멘터리니, 사진전이니 하는 곳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광경에 한참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으려 하자 식당 사장님께서는 단호하게 검은색 벨벳 천을 내려 사진을 덮으며 말씀하셨다.


“제가 이 사진 한 장을 찍으려고 3개월을 백두산 천지에서 텐트 치고 노숙했습니다.
 그럴 분들은 아니시라고 생각하지만, 마치 직접 찍으신 것처럼 사칭하시는 분들이 있어
 사진 촬영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부디 눈으로만 감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장님에게서는 자부심과 함께 예술가 특유의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3개월 동안 날씨가 문자 그대로 지랄맞은 백두산 꼭대기에서 노숙을 했다니.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든 제법 공들인 사진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노을 사진은 매일 노을이 지는 그 순간에만 찍을 수 있는 법이고, 변덕이 심한 백두산 천지가 쉽게 제 속살을 내줄 리 없었으니까. 오죽하면 삼대가 덕을 봐야 천지를 본다는 말이 나올까. 그 고생을 하고 찍었으니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타고, 또 누군가가 그 작품을 함부로 도용하는 꼴도 봐줄 수 없었겠지.



다음날 지프차를 타고 천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도 결국 천지는 내 두 눈으로 보지 못했다. 12시간씩 추위에 떨고, 비에 젖어가며, 화장실을 참는 고통 속에서 천지를 못 봐서 아쉬웠지만 어쩌겠나. 식당 사장님 말마따나 3개월을 노숙해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하니 12시간에 불과한 내 노력이 부족했을 뿐인걸. 나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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