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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9. 2022

한강 뷰를 찾는 이유

이탈리아보다 히말라야


  “오늘 뭐함?”

  “인왕산 갔다가, 윤동주 문학관이나 갈까 하고 있지.”

  “갔다가 저녁 콜?"


  재작년 겨울, 그러니까 코로나 시대가 막 열리기 시작할 무렵 내 친구 K와 거의 매주 만나 당구를 치고, 밥을 먹고, 피씨방을 다녔다. 회계 법인을 다니던 K가 퇴사를 하고 경력직 취준생이 되면서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때였다.


  코로나 때문에 어쩌다 있던 스터디도 취소되고, 모임 약속마저 줄줄이 취소되는 통에 몸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는데 K의 연락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평소처럼 집에서 뒹굴거리다 K에게 연락했더니 인왕산에 간다고 했다. K와 저녁이나 먹기로 하고 시간에 맞춰 대충 씻고 길을 나섰다.


  그나저나 인왕산에 갔다니. K가 등산을 좋아했던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K를 만나 물었다. K는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 종종 산에 자주 다녔노라고 말했다, 회사에 다닐 때도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거나 약속이 없는 주말에도 인왕산과 윤동주 문학관을 찾았단다. 코로나와 퇴사가 겹치면서 시간이 많아지니까 등산이 제일 만만하다나.


  등산이라... 생각해보니 등산이라면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딱히 돈이 드는 활동은 아니다. 나 같은 경우는 어렸을 적에 곧잘 다녔던 좋은 기억도 있었다... 나도 심심할 때 산에나 가볼까? 체력도 기를 겸? 어차피 멀리 있는 유명한 산은 체력도 안되고, 자동차도 없으니 이동 자체도 힘들다. 대신 서울 근교의 뚜벅이로 갈 수 있는 산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나 홀로 등산의 첫 번째 목표는 인왕산이었다. 인왕산은 서울 종로구 소재의 높지 않은 산으로 초보 등산러들에게 무난한 코스로 추천받는 산이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과 손 붙잡고 올랐던 기억은 있는데, 어렴풋한 기억 속의 인왕산과 25년 만에 찾은 인왕산은 사뭇 달랐다. 그 당시 어떻게 인왕산에 도착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홍제역에서 내려 인왕산 입구까지 가는 길 자체는 처음 걷는 느낌이었다. 언덕길이라는 점만 빼면 도저히 산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좌우로 우뚝 서 있는 아파트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산 길에 들어서 한참 올라 ‘범바위’를 지나니 어렴풋이 ‘호랑이가 아직도 살까?’라며 천진난만한 질문을 던지던 초등학생의 내 모습이 언뜻 떠오르는 듯도 했지만, 좌우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낯설었다. 아니, 과거 인왕산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내 기억 속의 ‘등산’을 떠올렸을 때 그려지는 이미지와 비교했을 때 인왕산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질적이었다. 


   내가 발을 내딛는 바닥은 아스팔트 길이 아니라 흙길이었으나, 풍경은 아스팔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동쪽으로는 어렴풋이 청와대와 경복궁이 보였고, 그 뒤에 종로/광화문의 빌딩이 우뚝 서 있었고, 서쪽으로는 통일로를 가로지르는 내부순환로와, 통일로 좌우에 병풍처럼 들어선 아파트들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등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서울 도심에 가장 가까운 산이기 때문이겠지.


  인왕산 못지않게 초보 등산러들에게 각광받는 아차산은 인왕산과는 달랐다. 아직까지 북한산이나, 도봉산 등은 무리일 것 같아 상대적으로 무난한 아차산을 두 번째 목표로 삼았다. 아차산역에서 내려서 아차산 입구까지는 인왕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건물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정도?


  등산로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전혀 다른 세계였다. 도시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아차산 생태공원이라는 간판과 함께 고구려 역사 유적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아차산을 오르는 내내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흔적이라는 ‘보루’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인왕산에도 조선 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기 위한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긴 했지만, 한양 성곽은 벽돌을 잘 가공해 쌓아 올려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반면 흙으로 쌓아 올린 아차산의 보루는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보루의 특성상 쳐들어오는 적이 잘 보이는 곳에 설치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차산의 풍경은 사방이 탁 트여서 답답하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한강이 잘 보였고, 높은 빌딩이라고 해봐야 강 건너에 있는 롯데타워 정도가 전부였다. 이제야 산에 왔다는 느낌이 실감이 났다.


  왜 그렇게 서울 사람들이 ‘한강 뷰’를 외쳐대는지 알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서울의 논두렁이었던 마곡지구가 개발되면서 서울에서는 탁 트인 풍경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어디를 가나 고층 빌딩과 아파트로 대표되는 콘크리트 숲이 시선을 가로막고 있다. 한강공원 정도나 나가야 뻥 뚫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높이보다 더 큰 문제는 서울의 도봉구에서 강남구까지, 강서구에서 강동구까지 어느 동네를 가도 비슷비슷한 외경이다.


  어딜 가나 비슷한 풍경인데, 한강만큼은 다르다. 완만한 U자를 그리며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은 내가 서 있는 위치마다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물론 10여 개가 넘는 한강공원조차도 축구장과 벤치와 편의시설 등이 모여 있는 비슷비슷한 구성이지만, 봄의 한강공원, 겨울의 한강공원, 여름의 한강공원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뽐낸다.


  매일 똑같은 풍경을 보며,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일만큼 지루한 것도 없다. 아니, 과장 조금 보태면 미칠 노릇이 아닐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주변 풍경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왔는지, 잘 가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우리에게는 새로운 풍경이 필요한 이유다. 괜히 사람들이 틈만 나면 핫 플레이스를 찾아 인증샷을 찍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다. 한강 뷰, 한강 뷰를 외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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