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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Oct 17. 2021

그놈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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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재와 은지를 유치원과 어린집에 보내고 바쁘게 또 나만의 일인 '집안일'을 하고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태준이 엄마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놈의 아내인 걸 안 순간부터 그녀를 편한 마음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안 그래도 자기 남편이 나쁜 놈인 줄도 모르고 같이 사는 불쌍한 사람을 나까지 속이는 기분이랄까?


솔직히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말할 수는 없고, 아예 피하고 사는 게 속 편할 것만 같은 기분으로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다.


그놈에게 최후통첩을 전한 이후 몇 주가 지났지만 새로 마주친 적은 없다.


그놈 말대로 나를 잘 피해 다니고 있는 건지, 진짜 이사를 하려고 알아보는 중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놈에게 이사를 가라 마라 할 권리도 없고, 그놈에게 그렇게까지 말한 게 미안했는지 이렇게만 마주치지 않고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리 동 3층은 필로티 구조라 아래층이 비어있다. 이제 뛰어다니기 시작하는 어린아이를 키우기가 매우 좋다.


구하기도 어려운 이런 집을 일부러 찾아서 이사 왔을 수도 있는데, 나만 참으면 해결될 걸 일을 키웠다는 자책감도 든다.


우리 둘째 딸의 친구 태준이가 맘껏 뛸 수 있는 보금자리를 빼앗은 느낌이랄까?


시간이 됐다.


집 앞에서 오랜만에 태준 엄마를 만나 같이 집 근처 돈카츠 집으로 향했다.


주문을 하니 태준 엄마가 먼저 말을 꺼낸다.


"남편이 언니랑 분리수거하다가 인사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인상 좋으시다고 그랬어요."


그럴 리가 없다. 그녀의 사회생활력이 다시 한번 발휘된 것 같다.


내가 자기 옆 집에 산다고 말한 날, 당연히 와이프에게 나에 대해 물어봤겠지.


지금은 주부지만, 나도 사회생활이라면 부족하지 않을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대답에 사회생활력을 더해 본다.


"태준이 아빠도 서글서글하시니 성격이 되게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이렇게만 말해도 충분히 거북하지만, 이렇게 말을 끝내려니 썰렁하다.


안 그래도 요즘 태준이 엄마와 데면데면했는데, 대화가 툭툭 끊기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다.


"태준이 아빠 그런 모습에 태준 엄마가 반했나 봐요."


태준 엄마는 그놈 어디가 좋았는지 궁금했다.

그놈의 성격에 끌렸던 실수를 태준 엄마도 똑같이 했는지 궁금했다.


"태준이 아빠를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밝은 성격이 아니었어요. 그냥 조용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서 고백했어요."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태준 엄마가 먼저 고백을 했다고?"


"네. 그런데 자기는 전 여자 친구를 못 잊어서 고백을 못 받아준다는 거예요."


나를 버리고 만난 그 여자인가 보다.


항상 내 상처에 대한 원망의 대상은 그놈이었다. 그놈이 날 버린 것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누군가 때문이라 생각하면, 이상하게 내 분노가 평생 위로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늘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어쨌든 그놈이 내 마음에 대못을 박더니, 그 여자가 그놈 마음에 대못을 박았나 보다. 뭔가 그놈이 벌 받은 것처럼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통쾌하다.


"오, 태준이 아빠 되게 순정파시다."


마음에도 없는, 내가 가진 생각과 정반대의 리액션이 끝나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그렇죠? 그 모습이 또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빨리 성공해서 그 여자한테 다시 만나자고 할 거라길래 어쩔 수 없겠다 싶어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놈이 얼마나 그 여자를 좋아했길래 저렇게까지 했는지, 나를 저렇게 좋아해 준 적이 있었는지 기분이 나쁘면서도 그놈이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다.


"그런데 그 여자가 로스쿨 1학년 끝날 때쯤 결혼을 하는 바람에 저한테 기회가 왔어요. 태준이 아빠가 마음 정리될 때까지 옆에서 지켜만 보다가 변호사 시험 붙고 다시 고백했죠."


태준이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그들의 연애 스토리는 괜히 들은 것 같다.


그놈이 그렇게 나쁜 놈인 줄은 몰랐겠지만, 스스로 사랑을 쟁취한 그녀가 그다지 불쌍한 처지도 아닌 것 같고, 내 남자를 빼앗은 그 전 여자 친구 얘기를 들으니 나만 괜히 기분이 나쁘다.


그렇게 점심을 하고 집으로 같이 돌아가는 길.


부동산이 보이고 창가에는 매물들이 적힌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슬쩍 보니 지난번 봤던 호가보다 더 오른 매매 시세가 쓰여있다.


"태준 엄마, 먼저 가요. 나 잠깐 볼 일 좀 보고 갈게."


지금 사는 집을 팔고 지금보다 더 큰 평수의 목동 아파트이사 가는 이 보이는 것만 같다.


태준 엄마는 알겠다며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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