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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Oct 17. 2021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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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늦은 오후.

온 가족의 저녁 준비를 위해 집 앞 마트에 다녀왔더니 현관 입구에 쓰레기가 가득하다.


지난 목요일에는 남편이 회식이 있어서 일주일에 달랑 두 번 주어지는 분리수거 기회 중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그날은 분리수거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는데, 오늘 마트 한 번 다녀왔더니 뭔가 버릴게 많다.


원래 분리수거 담당은 남편이지만, 오늘 저녁 메뉴가 고기구이였던 만큼 기름기 많은 설거지를 남편에게 미루고 내가 분리수거를 자청했다.


아이들을 너무 예뻐하고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아주 잠시 아이들과 떨어지는 시간이 왜 그리 꿀 맛 같은지. 마트에 가거나 분리수거를 할 때는 꼭 쉬는 시간을 갖는 기분이다.


분리수거 개시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설마 그놈과 마주치지는 않겠지. 하필 오전부터 집안 대청소로 머리는 감지 않았고, 저녁 고기 파티까지 하다 보니 몰골이 영 말이 아닌 상태다.


살짝 걱정은 되지만 흔히들 말하는 '머피의 법칙'까지 재수 없게 날 따라다니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다. 난 그래도 늘 운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순식간에 사랑이 변하는 그런 놈과 헤어지게 된 것도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주 조금은, 이런 몰골로 나가야만 '머피'란 운명이 꼭 그놈을 내 앞에 데려와 줄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양손으로 분리수거 쓰레기통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다 자연스럽게 301호 쪽을 바라았다.


경량형 유모차가 있고 그 옆에 작은 킥보드 한 대가 세워져 있다.


'진태준'


이름이 적힌 스티커가 킥보드 핸들 가운데에 붙어있다. 킥보드에 써진 이름에 '진규환'이란 이름이 오버랩된다.


순간 기계음이 들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는 고층에서 타고 내려온 사람이 있다. 3층에서 탄 것에 대해 조금 민망해 두 손으로 든 쓰레기통이 많이 무거운 척 한숨을 내쉬어 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그다지 무겁지 않은 쓰레기통을 들고,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편한 복장으로 분리수거장으로 간다.


"럭키 걸~" 


역시 그놈은 없다. 바로 옆집에 사는 그놈의 그 잘난 용안 뵈옵기가 이렇게나 힘들다.


보기 싫은 사람 안 보면 좋은 거지.


캔과 비닐을 분리해서 버리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플라스틱을 포대 자루에 쏟아부었다.


내 키의 반 정도 되는 쓰레기통의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양손으로 잡아 들어올린 모습이 썩 아름다운 모습은 아닌 것 같다.


누구라도 내 뒷모습은 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 집을 향해 돌아섰다.


오 마이 갓!


'머피'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듯, 그놈이 나를 보고 서 있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지만, 그놈을 마주치는 것은 수백 번 생각해 왔던 장면이다.


천천히 그놈을 응시한다. 한겨울에 반바지를 입고 두꺼운 카디건을 입었다. 변호사라 그런지 분리수거를 하러 나오는데도 차려입은 듯 깔끔하다.


무려 7년 만이다.


내 뒷모습만 보고도 나를 알아본 것처럼, 멀찍이 제자리에 서서 날 응시하고 있다.


나를 보는 차갑게 놀란 눈과 뜨겁게 아련한 눈빛이 묘하다. 7년 전에 내게 한 짓과 미안함이 떠올랐기 때문일 테지.


'날 마주친다면 그놈이 눈물이라도 흘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전혀 그럴 기미는 없이 아련하기만 하다.


순간 오늘 감지 않은 머리와 옷에 밴 고기 냄새, 후줄근한 옷차림이 뒤늦게 떠오른다. 재빨리 방향을 돌려 우리 집과 반대 방향으로 단지 깊숙이 발을 옮긴다.


놈이 들고 있던 것들을 거칠게 팽개치고 쫓아와 내 손을 낚아챈 후 '여기에 네가 왜 있어!'라고 소리치진 않을지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내 오른손에 들린 내 몸의 반만큼 오는 쓰레기통이 한없이 초라하다. 차라리 안 쫓아오는 게 고마울 지경이다.


저만치 걸어와 뒤를 돌아보니 그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시선이 나를 따라온 게 아니라 귀신에라도 홀린 듯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만나면 당장이라도 여기를 떠나라고 선전포고라도 하려 했는데, 그의 예상치 못한 등장과 나의 예상치 못한 초라함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왔다.


오늘 7년 만에 본 그놈은 태준이네 집에서 본 사진 속 모습과 똑같았고, 7년 전의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막상 마주하면 그때 못 때린 뺨이라도 때릴 수 있을 만큼 당당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만남을 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이 있다.


해소하지 못한 증오만큼 그놈을 대하는데 예상치 못한 부하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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