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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Oct 17. 2021

그 남자 진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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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에서 한 번, 태준 엄마에게 또 한 번. 연일 충격을 받고 인생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요즘이다.


오늘 오전에 엄마로부터 밑반찬 해놨으니 가져가라는 전화가 왔다. 남편 퇴근하면 남편한테 아이들을 맡기고, 안 막히는 늦은 저녁에 잠시 다녀올 참이다.


평소에도 엄마가 반찬을 해서 가져가라 하시, 바람도 쐴 겸 혼자 자주 다녀온다.


친정은 노량진동이다. 차로 20분 정도 거리. 오랜만에 혼자 야간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어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남편의 퇴근 후 차가 막히지 않을 9시 무렵, 엄마네 집에 도착했다. 아빠는 4년 전에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사시는 집이다.


이 집도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재개발하면 아파트 한 채씩은 받겠지만, 수입이 거의 없는 엄마는 그 아파트를 받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분담금이 걱정이다.


집에 오니 오빠도 와 있다. 엄마가 반찬을 했으니 나만 주지는 않을 터, 자식에 대한 사랑은 똑같다. 오빠는 안방에서 오래된 엄마 가구를 손보고 있었다.


"오빠, 오랜만이다. 혼자 왔어? 언니랑 애들은?"


어릴 때 사진을 보면 사이좋게 지냈던 것 같은데, 사춘기 이후로 데면데면 해졌다. 내가 오빠 친구였던 그놈과 사귀면서 관계가 이상해졌고, 헤어지면서 더 어색해져 버린 세상 하나뿐인 내 오빠다.


명절에도 내가 친정에 오면 오빠는 처가에 가기에 잘 보기가 힘든 이 사람. 거의 2년 만에 보는 얼굴이다.


"집에 있지. 엄마가 반찬 해놨다고 가져가라고 하시길래 늦게 퇴근하고 바로 들렀어. 맞다. 너네 집 많이 올랐더라. 축하해."


요즘은 어딜 가나 근황 이야기를 할 때도 부동산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에이. 뭐 우리 집만 올랐나, 서울 시내 다 올라서 팔아도 갈 데가 없더라. 외벌이에 빚은 잔뜩이고 허리가 휜다."


무주택자인 오빠에게 집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다가 거시 경제학적 관점의 부동산 폭락론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되기에 알아서 피한다.


"아, 그나저나 오빠 친구는 잘 지내? 진귀한 씨인가 진규환 씨인가 있잖아."


나와 그놈 간의 최악 엔딩에 오빠가 내게 미안해한다는 걸 안다. 물론 나도 오빠가 친한 친구를 잃은 것에 대해 도의적인 미안함을 갖고 있다.


내가 아파한 걸 고스란히 봐온 오빠이기에, 최근의 일을 말해주고 복수까지 했다는 말로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고 싶었다.


"아직 규환이 못 잊은 거 아니지?"


7년이면 긴 세월이다.


내 남편이 둔하긴 해도 나와 사이가 안 좋거나, 서로를 웬수같이 여기며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런 남편과 아이 둘을 기르며 이 험난한 세상과 7년을 싸워 왔으면, 그런 미련한 미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그런 나쁜 놈을 내가 왜?"


오빠의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부정을 한 후, 최근 내가 겪은 이야기로 오빠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려던 참이다.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 이미 다 지난 일이고, 너도 애 낳고 잘 살고 있으니 이제 얘기해줘도 될 거 같아서 얘기하는데."


오빠에게서 이상한 말이 나오려 한다.


"뭘?"


느낌이 쎄하다. 태준 엄마가 청담동 집 있다고 말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규환이가 너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 다 엄마 때문이었어. 엄마가 규환이네 집 가난하다고 너랑 만날 때도 탐탁지 않아하셨던 거 알지?"


오빠의 입에서 내 눈을 뗄 수도, 내 입을 뗄 수도 없었다.


"엄마도 네 고집 잘 아니까 그냥 두고 보셨는데, 규환이 취업하고 나서 네가 결혼한다고 나대는 바람에 엄마가 직접 규환이 만나려고 하셨어."


나는 처음 듣는 얘기다. 등골이 오싹하다.


"그래서?"


엄마가 그에게 뭘 하려 했는지 예상이 되면서 내 목소리가 작게 떨린다.


"나한테 규환이 전화번호 달라고 하시길래 무슨 얘기 하실지 뻔하니까 나도 연락처 안 드리고 버텼지.


그렇게 엄마랑 나랑도 사이 안 좋아지고, 한참 동안 말안 하고 지냈어. 그런데 언젠가 나 불러 앉혀놓고 하나뿐인 동생이 못 사는 집에 시집가서 평생 자기처럼 불행했으면 좋겠냐고 우시더라."


엄마가 울었다는 얘기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그쯤 되니 엄마 마음 돌리는 건 틀린 거 같고, 사위 사랑 장모라는데 장모 될 사람이 저러면 규환이도 불행할 거 같아서 내가 직접 얘기했어.


그러니까, 규환이 너무 미워하지 마."


표정관리가 안된다. 내 감정이 정확히 어떤지도 모르겠다.


내 생에 가장 힘들었던 사건에서 당사자인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화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한다면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하는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확실한 건, 금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것뿐이었다.


7년간 그를 증오하고 저주했다. 7년 만에 만나서도 그가 아프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내게서 그를 빼앗아 간 것은 다른 여자도 아닌 내 엄마였고, 변한 것은 그의 마음이 아닌 내 믿음이었다.


"미영아, 반찬 다 쌌으니 나와봐."


내게서 진규환을 빼앗아 간 엄마가 나를 부른다. 오빠가 눈을 한번 크게 뜨며 내색하지 말라는 신호를 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당시 내게 말하지 못한 오빠도, 그를 반대한 엄마도 다 이해할 수 있는 철이 든 동생과 딸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때문에 엄마와 오빠를 더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잘돼서 결혼했다면, 우리 은재와 은지를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도 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적어도 그 오랜 시간 그를 원망하며 사는 불행한 일은 없었을 거고, 다시 만난 그를 또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철이 든다는 게 나 스스로에게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이해심이 많아지는 만큼 원망할 대상도, 화를 낼 곳도 없어진다.


그렇기에 공감을 받을 곳도, 기댈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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