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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Oct 17. 2021

청담동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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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으로 가는 걸 포기하고 이 집 한 채 있음에 감사해하던 어느 날, 은지 어린이집 등원 길에 만난 태준 엄마가 커피 한 잔을 청하며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태준 엄마와의 티타임은 흔한 일이지만, 태준 엄마의 태도는 오늘 사뭇 달랐다.


집에 와서 집 정리를 서두른다. 태준 엄마의 표정이 뭔가 할 말 있는 사람같이 느껴졌고, 나도 그 할 말이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다.


재빨리 301호의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어머, 일찍 오셨네요. 들어오세요."


나는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이른 방문을 했지만, 그녀의 집은 예상대로 깨끗했다.


"금방 커피 내릴게요."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그녀와 커피를 기다린다. 이윽고 커피와 비스킷이 쟁반에 놓여 식탁에 올랐다.


"태준 엄마, 오늘 나한테 할 말 있지?"


초인종을 누르면서부터 입 밖으로 튀어나오던 걸 겨우 틀어막았던 말이다.


"언니, 눈치 진짜 빠르신 거 같아요. 다른 게 아니라 저희 이사 갈 거 같아요. 이 동네 참 마음에 들었는데, 언니도 계시고. 너무 아쉬워요."


그놈이 그래도 내 통보를 무시하진 않은 모양이다.


조금은 예상했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 주만에 새로 전세를 구해서 나가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겨울이라 전세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놈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도 든다.


"어디로? 너무 아쉽네. 여기 온 지 몇 달 안됐잖아요. 집주인이 갑자기 나가래요? 요즘 전세 구하기 무척 어렵다는데 이사 갈 집은 구했어요?"


내가 그놈에게 이사 가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놓고는 모르는 척 그녀에게 묻는 게 썩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이 아내에게 어떤 이유를 대고 이사를 가자고 했는지는 무척 궁금했다.


"청담 쪽으로요. 거기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세입자가 갑자기 사정이 있어서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새로 세입자를 구할까 했는데, 남편이 회사랑 멀어져도 그냥 우리가 들어가자고 하네요."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배신감도 느껴진다. 집 한 채는 있어야 한다며, 그동안 내가 그녀에게 해왔던 같잖은 충고에도 가벼운 미소만 보여주던 그녀다.


내가 고작 이 아파트 한 채 기세등등해서는 조언이랍시고 떠들어댄 게 너무나 창피해서 원래부터 집이 있었냐는 질문조차 할 수가 없었다.


청담동이라니. 우리나라 부자들만 산다는 동네 아닌가. 어쩐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태준 엄마는 부티가 줄줄 흐르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이제 와서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속물같이 느껴다.


"언제 이사 가는 거예요?"


굳은 표정과 함께 가까스로 입을 뗐다.


"아마 다음 주 말쯤 갈 거 같아요. 조금 급하게 움직일 거 같아요. 아쉬워서 어떡해요 언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많은 사람이 형님이고 언니라던데, 갑자기 언니라는 호칭이 불편해진다.


그녀의 모든 말이 가식처럼 느껴질 법 하지만, 난 그녀의 착한 천성을 믿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게 집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혼자 잘난 척을 해댄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항상 겸손했다.


청담동 사모님, 배운 사람이라 그런지 역시 다르다.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좋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그걸 천박하게 드러내지 않고 내 자랑을 온전히 들어주었다. 나는 그것에 악의는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태준이네는 청담동으로 떠났다.


태준 엄마는 나와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이사 가기 직전까지 내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었지만, 마지막까지 그놈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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