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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Oct 17. 2021

제자리

16  of 16

엄마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엄마 집을 나섰다.

평소에도 혼자 계신지라 딸내미랑 더 시간을 보내고 싶으셨을 테지만, 늦은 밤에 들어가면 내가 남편에게 곤란해질까 내 길을 재촉하신다.


집은 20분이면 갈 수 있지만, 30분이 넘게 길을 헤매고 있다. 머리와 마음이 복잡한 만큼 집으로 가는 길이 멀어진다.


"규환이가 어찌나 울던지. 술집에서 둘이 술 마시다가 같이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자기 처지 때문에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은 규환에게도, 친구에게 자기 동생과 헤어져 달라고 말한 내 오빠에게도 연민이 생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옛날부터 고집이 셌던 내 문제일까?

내가 고집이 세지 않았다면, 엄마가 결혼 허락해 주실 때까지 그와 같이 싸워 이겨낼 수 있었을까?


괜히 죄없는 사람의 자존심만 완전히 뭉개버린 것 같아 미안함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규환이가 너랑 헤어지고 얼마 안 돼서 그 좋은 회사를 관뒀어. 판검사 돼서 엄마 마음 돌린다고 로스쿨 준비하겠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도 걔가 로스쿨 졸업할 때까지 너더러 기다리라 할 수도 없고, 혹시나 네가 기다렸는데 규환이가 마음 변할 수도 있고 해서 말 못 했어."


오빠의 말이 계속 맴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고 사방팔방 그놈은 못된 놈이라고 떠들어댔다.


그가 집 앞에서 날 보던 눈빛이 생각난다.

그 아련하고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듯한 그 눈빛.


그에게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다 네 탓이야'라고 원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불편하니 네가 떠나라고 윽박지르고 욕을 한 내가 너무도 미워진다.


그는 그런 불편과 모욕을 다 견디면서도 아무 말 없이 내 요구를 묵묵히 들어줬다. 그동안 나만 몰랐던 사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아파트 외벽이 보이고 입구 쪽의 문주가 보인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문주가 잘 보이는 길가에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


문주를 멍하니 바라보다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의 곁에 내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그가 더 빛나게 된 건 아닐까?


그 질문들에 대해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한결 마음이 편하다.


어차피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규환에게 찾아가 사과를 할 수도, 틀어진 모든 걸 되돌릴 수도 없다.


이 아파트로 부자가 됐지만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사랑이 변한 게 아닌 걸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내게 어울리는 내 자리로 돌아갈 일만 남은 거겠지. 그가 변호사 아내와 청담동으로 간 것처럼 말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 그런 좋은 사람과 내가 추억을 나눴다는 것에 역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느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내 가족에 충실하고 가끔씩은 뒤에서 묵묵히 그의 행운을 비는 것, 그뿐인 것 같다.


마음을 정리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 순간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남편의 메시지다.


'반찬만 가져오지 말고 장모님께 감사하다고 용돈이라도 좀 드리고 와. 애들 다 씻기고 재웠으니 장모님이랑 말동무 좀 해드리고.'


곰탱이 남편이 진짜 '양평동 센스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이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자동차의 기어를 'D'로 바꾼다. 그리고 가볍게 액셀을 밟 아파트 문주로 향한다.


나의 집, 나의 가족을 향해 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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