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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ler Nov 23. 2020

누구와 사세요?_ 가족의 범위

20세기에 배우고 21세기에 살기_05

나는 보수적인 공무원 부모님과 형제자매 사이에서 평범하게 자라서, 또 비슷하게 평범하게 자란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흔하디 흔한 맞벌이 월급쟁이이다. 가족 구성원은 핵가족은 부부와 자녀, 대가족은 조부모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배웠다. 이에 현실에서도 취업 후 외할머니 장례식을 다녀왔는데 외조부모상은 공식 휴가가 없다는 상사의 사무적인 말을 들었던 세대이다. (당시 남편은 아내의 외조모상이라고 회사에 말도 못 하고 알아서 개인 휴가를 쓰고 새벽에 올라갔다.) 아직도 드물게 차가웠던 상사의 말투가 마음의 꼬투리로 남아있다.  




#1

어느 날 아침, 팀원이 전화해서 @@가 아무래도 너무 힘들어해서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전화가 왔다. 그녀는 핼쑥한 얼굴로 점심시간이 다 되어 사무실에 들어섰고, 아무래도 오후에 다시 가야 할 것 같다고 간신히 입을 떼었다. 동료는 @@이를 걱정하며 그녀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었고 결근처리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아주 인정머리 없는 팀장이 될 분위기였다. 


미혼인 그녀의 @@이는 유일하게 동거 중인 반려견이다. 


#2

독일에 근무할 때 일이다. 교육 강연을 위해 온 미국인 스피커가 연단에 올라 인사를 하고 약간의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작했다. "My wife has told me..."

 

응? 내가 잘못 들었나? 연단 위의 그녀는 분명 여자인데?

그녀는 스스로 레즈비언이며 결혼해서 부인과 산다며 당당히 밝혔다.


#3

외국인 친구와 서로의 아이를 보내는 학교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을 파트너라고 부르는 것을 감지했다. 흔치 않은 어휘 구사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녀가 먼저 말했다. 아이 아빠랑 결혼한 사이 아니라고. 어지간한 결혼생활 이상 같이 살고 아이도 같이 키우지만 Husband&Wife 관계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4

해외에서 첫 학부모 상담을 하는데 선생님이 아이에게 혹시 형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외동이라고 프로필에 적어냈는데 아이가 자기는 서울에 시스터도 있고 브라더도 있다고 한다는 거였다. 안 그래도 아빠는 안 와서 싱글맘 모양새인데 족보 꼬인 집으로 보이기 딱이네.

한국에서 대부분 사촌들이 가까이 살아 자주 보기도 했고 모두 외동 아님 둘이라 너희들은 다 가족이라며 누나 형 동생으로 부르고 했던 것이 이렇게 해석이 될 줄이야. 결정적으로 커즌이란 단어를 몰랐던 것이 선생님의 오해를 샀던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5 

사회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와 저녁을 먹다가 서로의 아이가 또래인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도 보여주면서 이야기하다가, 그녀가 말했다. 


"안 닮았지? 입양한 아이야" 

순간 그녀가 달라 보였다. 동시에 그녀를 다시 본 내가 여전히 참 편협한 시야를 가지고 있구나 라는 타격에 더 당황했다. 나름 그동안 다양한 삶들과 만나며 오픈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 사진을 보는 그녀의 눈에는 꿀이 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면서도 말이다. 



사실 더 다양한 가족의 형태는 해외 근무하던 시절 현지 친구 동료들에게 경험한 경우가 많기는 한데,  지금 한국에서 30-50대의 가족 구성도 매우 다양하다. 아예 결혼을 하지 않거나 이혼하고 사는 경우도 흔하고, 한국에 사는 국제 부부도 낯설지 않다. 딩크족도, 아이를 공개 입양하고 싶어 하는 부부도 꽤 늘었다. 아직 공개가 쉽지는 않지만 동성부부도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즉, 가족의 범위에 국적, 혈연, 남성, 여성의 정의는 더 이상 포함되지 않는다. 나아가 반려동물도 가족의 일원이다. 


이제 사회는 비혼모 허수경을 보던 시선에서 사유리를 보는 시선으로 많이 달라지고, 홍석천의 성적 성향 하나로 그의 인생을 재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내 아이의 어떤 선택에도 진심으로 쿨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것이 개인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동안 배워온 유교적 가치에서 백 퍼센트 자유롭지 못한 채 아이와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지. 독립 인격체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노력하겠다는 정도가 나의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집안 최초인 아들의 이혼을 반대하고 부정하다가 인정하기까지 너무나 아파하던 작은 어머니를 보면서 배운 바로는 말이다. 


회사의 상사들도 더 이상 출산휴가/육아휴직을 20-30대 여성만 낼 것임을 감안한 인력계획을 세우면 안 될 듯하다. 이미 남성들의 육아휴직은 시작되었고, 기혼 여성만 출산휴가를 간다는 보장도 없으며(!) 결재권을 가진 매니저의 출산/육아 휴직에 대한 플랜 B도 가용할 수 있어야 한다. 출산을 먼저 할지 승진을 먼저 할지 하늘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우자와 자녀 중심의 복지혜택에 대한 비혼 직원들의 원성에도 준비하시길. 



다행히 이제 많은 회사들이 외조부모상에 대해서도 조부모상과 같은 휴가와 조의금을 제공한다고 한다. 


갑자기 외조모상 당했다고 통보하고 결근한 나에 대한 상사의 마음이 

늙은 반려견 때문에 며칠간 회사 업무와 근태가 엉망이었던 그녀를 보던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시간이 꽤 지난 후에 그 상사가 말했다. 

"돌이켜보면 왜 그랬나. 우리 아이를 장모님이 다 키워주시고 요즘 둘이 죽고 못 사는데 그 아이가 외할머니 상에 못 가는 상황이라 생각하니 이제 이해가 가네."


늦게나마 알아줘서 고마워요. 

이제 내가 우리 팀원을 이해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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