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다니면서 참 싫은 건, 이런 기분이 엉망진창, 몸이 납덩이같은 날에도 출근은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감각 없이 무딘 정신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자동반사적으로 몸을 회사에 옮겨놨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리더와 면담을 하기로 했다. 오늘까지도 당위성을 내세우며, 퇴직 일자를 조정해주지 않으면 이직 사항을 밝혀야겠다 라고 마음속으로 다음 패를 꺼내 놓은 터였다.
밀실에서 이뤄진 또 한 번의 대화, 역시 나를 끝까지 붙들어서 남아있는 팀원들에게 평가를 잘 주려는 그의 의지와, 어떻게든 발령일자에 맞춰서 퇴사를 원하는 나 사이의 평행선은 선명했다. 이대로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려울 것 같아, 결국 이직을 선언했다.
"미리 솔직하게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한데,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출근을 하지 않더라도, 법적으로 두 회사에 이중계약으로 걸쳐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요청하신 날짜까지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
"저도 지금 회사와 좋게 마무리하고 싶고,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범위 안의 일이었다면 시도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몇 차례의 정적 끝에 리더는 나에게 말했다. 정확한 대사까지는 기억나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대충 뉘앙스는 이랬다. 퇴직 한 달 전 고지를 해서 퇴사 날짜를 리더와 상의하는 것이 보통인데, 한 달이 채 3일 되지 못한 시점(정확히는 28일 전)에서 알린 점이 나에게 유리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퇴사 결재 프로세스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권한이 있는 사람이기에 날짜까지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가 이렇게까지 내 퇴사 날짜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날 선 대화는 이어졌다.
"법적으로 퇴사 고지 후 1달 이내로 퇴직을 못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의 대답은 앵무새같이 한결같았다. 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권한자인 본인이 진행하지 않으면 그 과정이 껄끄러워질 뿐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본인은 그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런 일이 벌어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리더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기 위한 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아보고 말해달라고 한 뒤, 밀실에서의 대화는 종료되었다.
착잡했다. 결국 다른 사람 신경 거슬리게 하기 싫은, 어찌 보면 인간적으로 나쁠 것이 없는 리더는, 본인이 감당해야 할 곤란한 것들은 사전에 방지하려고 퇴사를 하고자 하는 팀원에게 반협박을 하는 있는 모양새였다. 나는 다시 한번 이런 상황을 마주한 것이 깊은 빡침으로 다가오면서도, 이것이 바로 인간이 이뤄놓은 조직과 사회의 민낯임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자 하는, 어떻게든 서로의 필요에 협조하려는 그런 마음은 무의미했다. 나 또한 인사팀을 통해 공식적으로 내가 한 요청이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아봤다.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는 행위였고, 직속 리더는 퇴사 날짜를 결정할 권한이나 강요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퇴사는 사실상 고지 후 일주일내로도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인사팀 담당자 면담 후, 자리로 돌아왔는데 리더로부터 메신저가 와 있었다.
본인이 했던 말이 감당이 안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그 또한 내 퇴직 요청이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본인이 나의 퇴직 날짜를 강요할 수 없음을 눈치챈 건지, 결단을 내린 듯 내가 출근할 수 있는 최대한 늦은 날짜까지 미루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리더는
몇 가지 이슈를 명분 삼아, 자비롭게 며칠간의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해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
퇴사를 고지하고 퇴사까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좋을 게 없다는 말은 이때부터 서서히 실감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후 나의 진로와 생활에 대한 더욱 자세한 질문들과 궁금증들을 나에게 던지기 시작했고, 나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방향의 노선을 택했지만, 이 또한 불필요하게 괴로웠고 다른 도리가 없이 하루하루 시간을 죽여낼 뿐이었다.
퇴직을 5일 앞둔 송별회식 날,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원래도 그다지 대화가 많지는 않은 개인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팀이지만, 그 날따라 옆에 앉은 선배가 유난히 나랑 대화를 섞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이제 며칠 남지 않았는데.. 조용히 밥이나 먹자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차려지는 음식에만 집중했다.
후식으로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 선배가 갑자기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더니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소리로
"아참, J님, C회사로 이직하신다면서요?"라고 외쳤다.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팀원 모두가 유학 준비로 퇴사 사유를 알고 있는 상황.
"아닌데요, 누가 그러시던가요? 잘못 아신 것 같네요"
하며 넘어가려고 했으나, 그이는 마음을 먹은 듯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다.
"그럼 아니에요? 다 소문났던데.. 사내 OO모임에서 다 말씀하셨다면서요?"
너무 구체적인 알리바이를 대서 이야기가 샜을 수 있겠다 하며 아차 싶었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꾹 눌러 참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제 진로에 대해 궁금하신 게 있으면 개인적으로 물어보시면 될 텐데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이 대화가 벌어지는 동안 뒤에는 리더를 비롯, 연차와 직급이 한참 높은 선배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이게 뭔가, 싶다.
"아니 좋은 회사가신다는데, 다 같이 축하할 일인 거잖아요. 오히려 J님이 발끈하시는 게 저는 이해가 안 되네요."
회식 후 회사 건물로 돌아가는 내내 그이는 나를 갈궜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리더는 듣다 못했는지 "그만하시죠"로 이 상황을 잠재우려 했다.
이때 내 감정이 극도로 치달았던 이유는 그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너무나 유치하고 비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세 가지로 나를 찔러댔다.
1. 모임에서 새어나간 정보의 근원이 누구인지에 대해 의심하도록 유도
2. 팀원들 모두를 속인 나를 멕이고자 함
3. 궁금함이나 가십성, 배신감(?)을 넘어서서 누군가가 퇴사 이유를 숨길 때의 상황을 단 한 번도 헤아려보지 않음
대체 뭘 축하하고, 뭘 좋은 회사란 말인가. 뭘 모두가 알아야 한단 말인가.
어찌 됐던 그는 1,2,3 모두를 제대로 완수했다.
먼저, 나는 버러지 같은 심정으로 OO모임의 구성원들을 합리적으로 의심했으며, 심리적으로 그들로부터 떠났다.
누구를 의심해야 할지, 어디가 시작인지를 알 수 없었고 그렇게 한들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이유나 정황을 따져 묻거나 추궁을 하는 것이 의미 없었다.
중요한 말은 어찌 됐건 전하지 않는 게 낫다. 다시 한번 내 모임의 사람들을 배려한 것이 배부른 짓거리였다는 걸 절감했다. 두 번째로, 나는 정확히 거짓말쟁이가 됐고 모두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실망했던 것은 1번이 컸지만 사실 누구 한 명을 집어 그 사람이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다고 하기엔 정보 누출 루트의 불확실성이 컸고, 개별로서는 좋은 관계였기에 금세 회복이 되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똑똑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그 선배가 왜 3번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 사람은 자기 입장 자기 욕구가 제일 중요한 것뿐이며, 나머지는 그 다음이라는 결론만이 남았다. 똑똑함과 예리함도 다른 이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그저 칼날이 되어 꽂힐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모든 일은 예측이 안되었고, 이쯤 되면 체념에 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나는 이후 한 마디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하지 못한 채로 모두를 속이고 떠나려는 강력한 배신의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이 시점에서 모두를 배려하고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는 것은 판타지이자, 내 욕심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들은 호의를 이용하기도 하고, 무심히 내던지기도 하고, 필요한 부분만 취하기도 한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퇴사까지 남은 4일 동안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척, 아무런 상처 안 받은 척, 아무 문제없는 척 벙어리처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