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에필로그

미안함이 자유의 대가라면 나는 끝까지 미안해야 했다. 그게 맘이 편했다.

by 언디 UnD

퇴사 직후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이직을 하게 되었던 터라,

그동안 참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다.

우선 출퇴근 시간이 왕복 25분에서 1시간반~2시간으로 늘었고, 자율출퇴근제는 허울뿐인 자율 속에 직장같은 눈치를 보게 만드는 제도라는 걸 깨달은 며칠.

그 때문에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는 애매한 변명으로 시작하는 글.

재미있는 건 내가 글을 업데이트 하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런치 플랫폼의 특성 때문인지 브런치 유입 독자 수는 간간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브런치의 '통계' 메뉴는 생각보다 이것 저것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내 브런치 유입 키워드는 아래와 같다. : 이후는 내 생각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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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대기업퇴사 : 아무래도 대기업 퇴사라는 것이 자극적인 소재인가 보다.

퇴사준비

퇴사 준비 면담

퇴사하는 방법 : ㅋ.. 이런 게 한 편의 글로 정리되어 있다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 자부한다.

합리적 퇴사 사유 : 세 어절의 단어. 이 키워드를 입력한 사람은 상당히 논리적인 사람같다.

퇴사 배신자

몰래퇴사준비 : 나처럼 사연 많은 사람.

몰래 이직 : 이 사람도 사연이 참 많겠지, 싶은..

이직 일상 : 요건 내가 앞으로 쓰고자 하는 글의 일부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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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구독자 수는 두 명이 늘었고(왜 구독하셨을까요? 궁금..ㅎㅎ), 몇번의 하트(좋아요?)를 받았다.

내가 어떤 작가의 글을 "구독"할 때에는 그 사람의 필력 자체가 좋거나 내용이 유익해서 글이 앞으로 업로드 되면 더 읽어보고 싶거나, 그 사람의 이야기 자체가 너무 흥미로워서 팔로업 하고 싶은 경우였는데, 나는 그 어느쪽이 되겠다는 의도 없이 글을 썼던 터였다. 그 당시에는 토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심정으로 쏟아냈던 매우 개인적인 글들이라, 대중적 공감을 얻는다거나 모두가 궁금해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발행을 했었는데 그 몇 명이 표현한 관심 덕분에 글을 쓸 이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도 이런데, 몇백-몇천의 구독자와 수많은 하트를 받는 작가들은 얼마나 큰 위로와 행복을 경험할까 하는 부러움과 선망의 마음이 들었다.


나의 상황이나 브런치 글에 대한 관심이야 어찌되었건, 마지막 퇴사 그날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으로 남긴다. 그 날은 아침부터 별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는지,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였는지, 그 날은 머리는 온통 다른 곳에 가있고 몸만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떠날 곳이라고 생각하니 홀가분하게 생각도 들었다. 여기 있었던 모든 기분나빴던 일들도, 존중받지 못했던 내 지위나, 늘 숨죽였던 자존심도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내가 이 회사에 가지고 있던 애정과 기대감 때문에, 그 애정과 기대감을 돌려받지 못해서 느끼는 서운함이나 불쾌감이 아니었나 하는 성찰도 했다. 나는 많이 쏟아붓고 싶었고, 그것이 온전한 내 것이 되는 경험을 하고 싶었지만, 회사와의 일체감이란 사치스러운 이상의 산꼭대기 정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남았다.


그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동기모임의 동기들은 나를 불러 서프라이즈 케익을 선물해주었다. 이런걸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다들 따스한 표정으로 축하해주고 응원해주는 모습을 보니.. 그래.. 이들이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내 이야기를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녔겠는가.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지금 이 시간에서 감사하고 행복하자. 하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속도 없이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에게 가장 현실적인 조언과, 지금까지 팀을 오고 간 수많은 사람들의 입-퇴사 히스토리를 전해주었던, 선배와 차를 한잔 했다. 아티스틱하게 꾸며져 있는 (우리 회사 아닌) 계열사 로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선배 없었으면 아마 답답해서 이미 저 세상에 있을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더 머리 굳기 전에 더 넓은 물로 나가시라고 ㅎㅎㅎㅎ 싸가지 없는 덕담도 해드렸다. 넉살 좋은 선배는 정신이 확 차려지는 기분이라며 받아주었다.


드디어 다가온 퇴근 시간. 지난 번 나를 제대로 멕여주었던 그 선배와는 아직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상황.

먼저 리더와 다른 선배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라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그 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맺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옆자리에 앉은 그 선배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아마, 이야기 했던 것과 다른 소문을 들어서 많이 당황하고 놀라셔서 그러셨던 것 같다고. 미리 말씀 못드린 상황이 있었고 죄송하다. 건강하시라고, 감사하다고. 호인인 척. 사과와 감사를 먼저 전했다.

그 선배는 아직도 내가 거짓말 한 것이 못내 맘에 안들었는지,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던 것인지

"그 회사 가는건 맞는 거에요?" 라고 되묻는다.

"(속으로 푸훗..)네, 맞아요."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이렇게 쉬운 일인 것을..

언제 이렇게 회사에 다녔나 싶을 정도로, 네모지게 반듯한 회사 건물이 갑자기 전혀 알지 못하는 회색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내 것이 아니게 된, 아니 처음부터 내 것은 아니었던, 세 들어 살던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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