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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Jan 14. 2022

당일치기 혼자 제천여행(3)

배론성지 이야기

택시를 탔더니 배론성지까지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버스가 하루에 3번만 운행할 정도로 외진 곳이다. 외국어인가 싶을 만큼 특이한 배론은 배의 밑바닥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배 주(舟)자를 써서 주론(舟論)이라고도 한다. 후안 베론(Juan Veron)이라는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 이름을 떠올릴 정도로 천주교 성지라고 해서 배론이 스페인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배는 잘 알겠는데 '론'이라는 표기에서는 도무지 밑바닥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 답답한데 누가 좀 알려주면 좋겠다. 



제주도에 있는 천주교 시설 중에 이시돌 목장이 있는데(우유 아이스크림이 맛있다.) 이씨 성을 가진 시돌이라는 사람이 제주도에서 천주교의 초석을 다진 것을 기념하는 목장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이시도르(Isidore)라는 스페인의 농민의 주보 성인의 이름을 우리말 식으로 딴 것이라고 한다. 아재들을 위해 TMI를 하나 보태 보자면, 고등학생 때 리더스뱅크라는 독해 교재가 있었는데 그 책의 저자가 특이하게도 이장돌이었다. 그러니 이시돌을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나. 베네틱트를 분도라고 하듯 스페인의 이시도르 성인이 한국에 와서 이시돌이 된 것이었다.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 이시돌을 한국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내가 여행하는 곳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사소한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여행은 깊어지고 넓어진다. 겨우 몇 시간 짜리 여행이라도 기억은 오래 간다.



하늘이나 높은 곳에서 보면 더 뚜렷하게 보이겠지만 언뜻 보아도 계곡이 흘러 내려가는 곳에 움푹 들어간 지형은 배의 모양을 떠올리게 했다. 그 형세를 따서 만든 대성당과 소성당은 큰 배 한 척과 작은 배 한 척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콘트리트 노출 마감을 해서 그런지 더 없이 소박했다. 도심에 있는 성당처럼 한껏 외양을 뽐내지 않고 산사처럼 자연과 어울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고 보니 그 성지에 있는 건물 어느 것 하나 튀어나오는 것이 없었다. 드러내지 않고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았다. 물질보다는 내면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으면 자유를 얻는다는 목불암 성각 스님의 말씀을 배론성지는 그 자체로서 사람의 입을 빌리지 않고도 하고 있었다. 종교시설이지만 묵상을 하는 명상센터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어도 한 시간 정도 걸으면서 묵상을 하기 좋은 곳이다. 대성당 앞 경사진 잔디밭 위쪽에는 푸근한 미소를 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 배론성지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빈 공간에 뭔가를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대성당과 소성당은 소박하지만 그 존재감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공간의 힘이 그런 것인가 싶다.



대성당 뒤로 돌아가면 최양업 신부의 조각공원이 있다.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그의 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공원에는 아크 형태로 만들어진 벽면에 신부님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40년 정도의 짧은 삶을 살면서 우리나라 초창기 천주교에 남긴 족적이 조각으로 남아 있다. 벽면 아래 쪽 검은 판석 위에는 카드 만한 작은 돌들이 붙어 있는데 가만 들여다 보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이름(세례명), 출생일과 돌아가신 날이 새겨져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님 곁으로 갔을 그들을 잊지 못해 이곳에 모셔 두었구나. 그 수많은 이들 중에 유독 어린 얼굴이 눈에 띄었는데 겨우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이였다. 우리 애들과 비슷한 또래라니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절절했을까?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분들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되 신앙의 힘으로 하루하루 잘 살고 계시기를 기도했다.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에 황사영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명주천에 13,311자의 청원서를 썼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사건이다. 어릴 때 국사책에서 읽었고 내용은 모르고 '황사영 백서사건'이라는 일곱 글자만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복원해 놓은 최초의 신학교 뒤로 돌아가면 황사영이 8개월간 숨어 지내며 백서를 썼다는 토굴이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되어 있다. 두 평이 될까 말까 한 면적에 허리를 다 펴지도 못할 높이의 토굴에는 십자가와 깨알같은 글씨로 쓴 백서의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원본은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니 천주교사에서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황사영은 여기서 8개월을 칩거하고 있었다고? 종교의 힘과 인간의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죽음을 각오할 만큼 절박했을 종교의 자유라니, 사람은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를 좇아 살아야 하는 것일까? 황사영의 죽음은 그가 그 당시에 원했던 종교의 자유를 완전하게 가져다 주지는 못했지만 종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후손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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