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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Dec 22. 2021

결혼 30주년

색연필 그림일기


결혼을 일주일 앞둔 친구 K가 밤 11시 넘어 나를 불러냈다. 막 잠자리에 누운 상태라 나가기 싫다고 했으나 K는 약혼자와 내기를 했다며 나와야 한다고 했다. K의 말인즉 진정한 친구 어쩌고 하면서 버스도 끊긴 늦은 시간에 친구의 부름에 과연 나와줄 사람이 있을까를 놓고 내기한다는 거였다. 지금보다 권위적인 사회였던 당시는 과년한 딸이 밤늦게 다니는 것이 흉거리였으니 우습게도 이런 내기가 가능했다. 그땐 그랬다. K는 진정한 친구는 나밖에 없다며 얼른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다. 나는 유치하다고 투덜대며 잠든 부모님을 확인하고 잠옷 위에 바바리코트를 걸친 채 맨발로 나와 택시를 탔다. 늦은 밤 작은 카페에는 친구 K와 약혼자 그 약혼자의 친구가 2차를 즐기고 있었다. 32년 전 가을이었다.


그 약혼자의 친구는 남편이 되었다. 남편은 잘 보이려고 꾸미지 않는 내가 쿨해 보여 좋았단다. 그날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 같지 않게 서로 편했다. 책과 음악, 영화에 대한 취향이나 기타 모호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정서와 가치관이 서로 비슷했고, 비슷하다고 느꼈다. 


동네에서 나는 꽤 인기가 있었다. 부모님께서 인심을 잃지 않으셨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매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좀 산다는 집안에서 나를 며느리로 달라고 어머니께 청을 넣거나 직접 내게 의사를 물어 온 댁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맏며느리감이라고 했다. 야박한 깍쟁이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스물예닐곱 나이의 철없는 여자애를 보고 맏며느리감이라고 여길만한 게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20대의 나는 데모엔 자신이 없어 열심히 봉사했고 열심히 술을 마셨으며 잦은 휴강에도 열심히 책을 읽었다. 어딜 가나 잘난 척을 했고 내가 똑똑하다 생각했고 맡은 일은 곧잘 해냈으니 그걸 보고 그리 평판들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여 남편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셨다. 남편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 학교를 휴학할 정도로 그는 사정이 좋지 않았다. 남편이 5학년 되던 해 시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지 못해 남편의 형제들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몫을 해내느라 진학을 포기하거나 해외에 나가 돈을 벌었다. 어린 남편은 출가한 큰 누나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우리의 결혼이 달갑지 않았던 부모님은 결혼 비용을 한 푼도 주지 않으셨다.( 나중에 어머니는 후회하시며 여러 가지 물질로 갚아주셨다) 우리는 대학원 진학을 위해 모아 둔 500만 으로 지하 단칸방을 얻고 성당에서 식을 올렸다. 우리가 결혼하던 30년 전 11월 끄트머리는 예상치 않게 몹시 추웠는데 돌이켜 보니 추웠던 그날의 날씨는 내 결혼 생활의 복선이었던 것 같다.


함께 살면서 우리가 넘은 많은 언덕과 산과 파도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어떤 산을 넘을 땐 이혼을 생각했고 어떤 파도 앞에선 아이를 잃을 뻔하기도 했다. 자격지심 때문에 결혼을 반대한 친정과는 일부러 멀리하고 살았기에 우리는 양쪽 다 비빌 언덕이 없었다. 남편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생활고를 겪을 땐 애들을 키울 자신이 없어 몰래 우울증을 앓았다. 살 수록 산은 더 높아졌고 파도는 더 크게 밀려왔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했던 우리의 공통점만으론 산을 넘을 수 없었고 파도는 더더욱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여정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기에 그저 넘어야 했다. 어떤 파도엔 우르르 무너져 함께 울었지만 소풍 같은 작은 언덕도 있어 우리는 그 언덕 너머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웃기도 했다. 비참과 외로움, 소망과 절망, 이상과 꿈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믿음을 잃기도 하고 다시 믿음을 키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견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넘어온 파도를 바라보는 부부

부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자질구레한 그의 모습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또 어떻게 어리석고 교만한 나를 견뎌 준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반복적으로 무너졌던 것이 어제 같은데 우린 30년째 부부로 살고 있다. '결혼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말도 있듯이 부부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최선으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작은 조각 한 개가 전체의 완성을 좌우하듯 눈에 띄지 않는 단순한 말 한마디, 무심한 눈빛, 숨길 수 없는 한숨 같은 작은 이 관계를 망치기도 하고 부부를 끈끈하게도 한다.


함께 살지만 독립적이어야 하고 익숙하지만 익숙하게 두어선 안 되는 관계. 고춧가루 낀 이를 보고도 존중을 잃지 말아야 하는 관계. 몇십 년을 살아도 자기 고유의 성질은 절대 동화되지 않는 관계. 깨지기 쉬운 유리면서도 칡뿌리보다 질긴 모순된 관계. 건너도 건너도 건널 수 없는 강이 부부인 것 같다.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 우리의 30주년을 함께 기념해 주며 샴페인을 따 주었다. 나는 셰프 흉내를 내며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굴요리로 상을 차렸다. 우리는 유쾌하게 웃으며 먹고 마셨다. 친구들이 돌아간 다음 날 아침 남편과 나는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했다. 고생했노라고, 나를 참아주어 고마웠다며 안아주었다.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며 한동안 우리는 포옹한 채로 있었다. 30년 세월이 우리를 하나로 만든 것일까. 설마 그럴리가! 함께 산을 넘고 파도를 맞는 여정에서 살아남은 동지면서 서로를 알아주는 지음이자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기에 하나니 둘이니 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의 포옹은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과 위로, 애정의 표현이었다.


'남의 편'이라 하여 '남편'이라고 하는 우스갯소리에 반해 그는 늘 내편이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리 생각하는 것이 나의 착각이라 해도 그가 내게 들키지 않았으니 그 또한 감사하다. 곡절 많은 30년 세월 또한 감사하구나.

우리가 넘은 산과 파도보다 더 큰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선 두 아들에게도 감사하다.

모든 섭리에, 모두에게

그와 나에게 감사하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브런치 독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새해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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