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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Sep 16. 2022

여름 방학이 끝나면 마른풀 냄새가 난다

색연필 단상


도서관 장서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어느새 높이 달아난 하늘. 오랜만이네. 저런 하늘. 빌린 책을 들고 주변 생태공원을 천천히 걷는다. 끈적했던 공기는 사라지고 만지면 바스락 거릴 것 같은 바람이 분다. 노랗게 익는 벼들, 강아지 풀들이 가득한 논둑. 마른풀 냄새가 났다. 우리 집 개처럼 턱을 들고 킁킁거려 보았다. 킁킁거릴수록 선명한 냄새들. 개들이 킁킁거리는 이유가 있구나.


마른풀 냄새가 나면 가볍게 부는 바람에도 씨가 떨어진다. 영근 것들은 힘들이지 않고 떨어진다. 영글어야 순하게 스스슥 떨어진다. 떨어져 내린 것들은 흙과 바람과 비와 흙 속에 몸 섞어 사는 것들과 섞여 또 생명이 될 것이다. 내가 힘든 이유는 억지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자연인데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억지로 떨어져 힘이 들고 자존심이 상해 성질이 난다. 저절로 떨어진 자리엔 상처가 없는데 성질부린 내 자리는 상처가 나서 거뭇거뭇하다....


목덜미따갑다. 햇살은 벼와 포도 위한 것이다. 햇살이 키운 것들이 나를 먹여 살린다. 햇살을 가득 받은 열매는 실하다. 자연은 어김이 없다. 어김없는 순리에 예외는 없다. 연스러운 이 순리는 엄정하다. 나약하고 비겁하여 나는 이 엄정함이 때로는 편하고 때로는 불편하다.


길가의 풀들

개학이 코앞에 닥친 5학년 아이는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다리가 저리도록 앉아 있어야 했다. 곤충채집, 독후감, 일기, 과학 관찰 일기 등 방학 숙제가 많았다. 일기와 독후감은 왜 늘 한꺼번에 했는지. 밀린 숙제를 하고 있을 때 열린 창으로 마른풀 냄새가 들어왔다. 열두 살. 그런 냄새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연필로 파인 손가락을 주무르며 마당으로 나가니 개들이 졸고 있었다. 집 안팎이 조용했다. 공연히 애정이 샘솟아 졸고 있는 개들 귀에 호호 입김을 불면 개들의 귀가 팔랑팔랑 거리고 강아지들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배가 불룩한 놈을 안고 올려다본 하늘은 높고 깊어 경계가 없었다. 주변이 노란빛을 띠 엄마는 하얗게 반사되는 머릿수건 아래 허리를 굽혀 빨간 고추를 따셨다. 엄마의 머릿수건에서도 졸고 있던 개들에게서도 마른풀 냄새가 났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공연히 우울해지면서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것은 다 컸다는 느낌이었고 뭔가 우쭐하면서 의젓하고 조금은 서글픈 알쏭달쏭한 감정이었다. 마치 몬테 크리스토프 백작의 삶을 살 것 같기도 하고 제인 에어의 슬픔이 마음에 들어와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엇인가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아는 것 같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아리송한 마이 자꾸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내지 않아도 되는 비밀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숙제할 생각은 없이 여전히 새까맣게 그을린 채 밖에서 놀고 있는 오빠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착한 우리 오빠는 나보다 세 살이나 많은데도 아무 고민이 없어 보였고 나는 하루아침에 나이를 먹어 오빠의 누나가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오빠는 새집이나 뒤지며 다녔고 숙제했느냐는 물음에 항상 숙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부루스 리(이소룡) 흉내를 내며 빈약한 알통을 자랑하던 오빠가 옆집에 사는 중학생 언니에게 가져다 주라며 접힌 메모를 줄 때도 나는 착한 오빠가 한심했다. 그 언니는 오빠보다 키가 컸고 얼굴이 하얬고 무엇보다 잘 웃지 않았다. 오빠는 몇 번 더 메모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방학이 끝나고 가을 교복으로 갈아입은 오빠도 옆집 언니처럼 더는 웃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학교 가는 내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던 날 오빠는 2학기 등록금을 들고 집을 나갔다. 일주일 만에 들어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던 오빠는 이상하게 당당했고 실직 상태였던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고 우셨다. 우는 아버지를 보는 건 아프고 무서운 일이었다. 그날 문밖에 서 있던 나를 지나쳐 가던 오빠에게서 담배 냄새가 섞인 마른풀 냄새가 새로 났다. 나는 더 이상 오빠를 한심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까맣게 탄 피부가 제 색을 찾아가면 공기는 더 건조해지고 밤엔 굵은 이슬이 맺혔다. 그러면 열린 창으로 마른풀 냄새가 쌓아둔 이불이 무너지듯 밀려들어왔다. 나는 가슬한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고 창을 열어둔 채 잤다. 더 많은 비밀 일기를 썼서랍에 꼭꼭 넣어둔 후 학교에 갔다.


여름 방학이 끝나면 나기 시작하는 마른풀 냄새. *소년과 소녀가 앞산을 향해 달려가던 들판에도 허수아비가 지키던 논둑에도 소나기를 피하느라 들어갔던 짚가리 주변에서도 마른풀 냄새가 났었다. 그 비릿하면서도 고소하고 햇살이 머문 단내가 공기 중에 가득 차서 나는 다시 새롭게 쓸쓸하고 충만하다.





*소설 <소나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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