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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Sep 27. 2022

배추전이 먹고 싶었는데

색연필 그림일기 2


점심시간인가 보다. 아랫집 공사 소리가 뚝 끊겼다. 우리 집 개 투투도 잔다. 투투가 자면 집안은 갑자기 적막해진다. 적막하면 남편은 음악을 튼다. 남편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쇼팽이 흐르고 나는 김서령 씨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읽었다. 책이 좋아서, 아니 쓰인 언어들이 외로워서 마음이 아팠다. 왜 좋아도 마음이 아픈 거냐.  배추전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우리 집 장을 주로 보는 남편은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엄청 비싼 걸 먹고 싶어 한다며 곤란해하는 눈치다. 배추가 많이 비싸냐고 물으니 물가가 미쳤다며 고개를 젓는다. 비싼 물가 때문에 배추전 먹는 일에도 결심이 필요한데 욕을 했네, 안 했네 하며 말들이 많다. 더 화가 나는 건 욕을 했네, 안 했네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뽑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뽑힌 사람도 뽑은 나라도 모두 한심스럽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내가 이상한 거겠지. 배추가 비싸다는 말을 들으니 배추전 먹고 싶은 생각이 삭 가셨다.



김서령 작가의 문장은 따뜻하고 격이 있으며 아름답고 예쁜 우리말이 많다. 박완서 선생이 서울 사람들도 모르는 서울 경기말을 잘 쓰셨는데 이 책은 경상도 말을 아름답게 누벼놓았다. 역시 우리말의 아름다움은 토박이 말이든 표준말이든 감각어(의성어, 의태어)에 있다. 각종 상황과 형태와 소리에 맞는 감각어는 대부분 반복되어 읽을 때 자연스레 리듬을 탄다. '콩가루를 치릇 붓는다, 칼질이 사그락 사그락 하다. 찬물에 활활 헹구다, 이틀이틀하다(연하고 실하다), 봄볕이 다글다글 내리쬐다'. 토박이 말이지만 격을 갖춘 것은 저자의 품성과 태도 때문이리라. 그러나 무엇보다 따뜻한 언어들이다. 심지어 외로움도 따뜻하다. 


고인이 된 작가에 대해 책의 편집자는 '한 문장이 졌다.'라고 썼다. 그 문장을 읽을 때도 눈물이 핑 돌았다. 지역 도서관 자료 검색을 해 보니 작가의 책이 몇 권 더 있다. 대출 신청을 눌러 놓는다. 대출 신청을 해 놓으니 오늘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문득 도서관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이상하게 자주 생뚱맞고 객쩍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런 생각들은 대부분 필요 없는 걱정들이다. 내 안 깊은 곳엔 나도 모르는 두려움이 많은 듯싶다. 이런 내가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상대는 우리 집 개다. 우리 집 개는 나와 달리 판단을 하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더니 네 발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다가 나를 본다. 아, 나도 판단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아노 소리가  떼구루루 굴러다닌다. 창밖 나뭇잎이 살랑거리며 흔들린다. 벌써 빨갛게 물이 들었다. 그나저나 동네 닭들과 거위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여름을 지나며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폭염 속에서 그들은 안녕하지 못한 건가. 살아 있어 고단하고 쓸쓸하며 살아있지 못해 슬프고 쓸쓸하다. 살든 죽든 쓸쓸하구나.


적막하다.  적막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것을 내 안에 들일수만 있다면.....

벌 한 마리가 창에 붙었다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알지도 못하는 김서령 작가가 보고 싶다. 그녀와 그녀의 주변 여자들을 생각하며 배추값이 내려가면 제일 먼저 배추전을 해 먹으리라. 그전에 텃밭 배추가 먼저 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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