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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Jul 21. 2022

<개> 이야기

색연필 그림일기 2


<알림>

김훈 작가님처럼 저도 알림을 써 봅니다. 누군가는 나보고 짧게 쓰라고 하지만 그럴 재주가 없어 글이 자꾸 깁니다. 기억과 아픔을 쫓느라 분별없이 더 길었던 것을 이 정도로 줄이느라 아주 고생을 했습니다. 재주 탓이고 나이 탓입니다. 뭔가 탓을 해야 저의 부족이 조금은 메꿔지지 않겠습니까. 부족한 사람들은 이럽니다. 인내심 있는 분들만 읽어 주셔도 많이 감사할 겁니다. '보리'의 슬픔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마음을 순하게 정화해 주길 소망합니다. 


 '보리'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개를 키워서일까. 김훈 선생의 소설 <개>가 눈에 띄었다. 선생의  <자전거 여행>이나 <라면을 끓이며> 같은 산문집을 주로 읽는 편이라 <흑산> 이후 그의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지역 도서관 검색을 하니 책은 없고 신청을 하면 열흘 후에나 빌릴 수 있다고 해서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공연한 조급증 때문이다. 오래전에 써놓은 것을 다시 손 봐 세상에 내놓는다는 알림이 있었다. 책은 부담이 없어 반나절이 못 되어 읽었으나 그 잔향은 오래 남아 조금 우울해졌다.


<개>는 진돗개인 '보리'의 관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태어난 농가가 수몰되자 주인을 따라 어촌으로 옮겨와 살게 된 보리는 옆 마을의 개 흰순이를 사랑한다. 그리고 개들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을 기다리며 옆 마을의 개 악돌이와 싸운다. 


"이 작은 책은 진돗개 '보리'의 사랑과 희망과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삶의 터전이 망가진 자리에 '보리'의 생명이 다시 뿌리내리기를 나는 바란다."라고 작가는 썼다. 


그리고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 나는 밑줄을 긋고 밑줄 그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문장의 표현은 마음에 남고 의미는 더 뚜렷해졌다.


 "사람이 사람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때까지 나는 또 짖을 것이다."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를 못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불쌍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다"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나는 세상의 개들을 대신해서 짖기로 했다. 짖고 또 짖어서 세상은 고통 속에서 여전히 눈부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갱년기가 지난 사람의 특징인가. 걸핏하면 감정이입이 심하게 일어난다. 몸을 낮춰 몸과 함께 목덜미를 끌어안으면  필시 그 옛날 우리의 개들처럼 듬직함과 친밀함을 나눌 수 있는 '보리'. 그런 ''의 슬픔이 한 방울의 잉크로 번져 붉은 노을과 그 노을이 진 후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검푸른 실루엣과 오버랩되며 기억 창고 맨 밑바닥에 있던 나의 슬픔을 소환했다.



우리 집 개 루비


아버지는 군인이셨다. 다리가 길어 군복이 잘 어울렸던 아버지는 6.25 참전 무공으로 받은 훈장도 소용없이 사관학교 출신의 부하들이 아버지를 앞지르며 승진을 하자 제대를 하시고 축산을 배우셨다. 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마지막 부임지였던 안동에서 서울 변두리로 터전을 옮겼고 아버지는 산 중턱에 집과 농장을 짓고 양계장을 운영하셨다. 당시 농장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10명 남짓 되었으니 작지 않은 규모였고 개들도 여남은 마리 넘게 키워 마을에선 '개 많은 윤대위집'이라고 불렀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는 TV를 사고 우리 집에만 전기가 들어오던 날 우리 가족은 무지갯빛 행복을 꿈꾸었으니 나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중동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석유 가격이 폭등하는 오일 쇼크가 발생했다. 물가는 무섭게 뛰어 아버지의 사업을 무너뜨렸고 계사에 전염병까지 겹쳐 자랑스럽던 기와집과 양계장, 그리고 TV에는 빨간딱지가 붙었다.


파란 기와집이 팔렸는지 경매로 넘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가 있는 읍의 작은 점방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 가기 전 날 유난히 노을이 붉었고 그 노을빛을 받은 채 우시던 어머니 얼굴과 충혈된 아버지의 눈빛 때문에 나는 너무 무서웠다. 집이 망했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지만 어른들의 절망은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큰 걱정거리가 개들이었다. 이사 갈 집은 마당은커녕 방 두 칸뿐인 작은 집이었고 점방을 겸하고 있어서 어머니가 한복 바느질집을 할 예정이었다. 게다가 셋집이어서 개들을 키울 수 없는 환경이었다. 부모님은 짐 정리를 하면서 아는 집에 개들을 보냈고 그중 몇 마리는 팔았다.(팔린 개들은 어디로 갔을까) 남은 개는 셰퍼트 캐리와 안동에서부터 함께 온 루비였다. 애초에 늙은 루비만 데리고 갈 생각이었고 캐리는 입양을 보냈다. 하지만 번번이 입양 간 집에서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것이었다. 아침이 되면 캐리는 돌아가야 했고 우리는 집을 떠나야 했기에 평소보다 많은 밥을 들고 캐리와 루비를 찾았는데 루비가 보이지 않았다. 캐리가 제 밥을 다 먹고 루비의 밥을 흘끔거려도 루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차표를 검사하던 차장의 눈을 피해 루비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던 기억이 난다. 골든 레트리버처럼 생긴 루비는(루비가 골든 레트리버인지 어머니는 모른다고 했지만 그 생김은 골든 레트리버였거나 그 믹스견이었다) 진한 황토색 털에 큰 귀가 늘어지고 눈이 착한 암컷이었는데 루비에게서 많은 강아지들이 태어났다. 때문에 우리 집은 개 많은 집으로 불렸고 동물이든 식물이든 뭐든 잘 키우시는 어머니의 손길로 집은 루비와 함께 늘 개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부모님께선 개들을 대부분 풀어놓고 키우셨고 셰퍼드들을 농장 귀퉁이마다 묶어두셨는데 아마 농장을 지키게 하셨던 것 같다.


그중에 루비는 그냥 개가 아니라 루비였다. 즉 우리는 루비를 다른 개들과 달리 특별하게 여겼다. 루비는 집의 개들에겐 그랜드 마더였고 우리에겐 형제요, 보디가드였다. 자기 자식들과 그 개들의 새끼들까지 집안의 개들을 통제했을 뿐 아니라 우리 형제들과 뛰어놀며 우리들을 보호해 주었다. 집 아래에 있는 마을에 어머니 심부름을 갈 때도 루비를 앞세워 갔는데 마을 사람들은 동네 개들과 다른 루비를 무척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마을 아이들은 우리를 부러워했다. 개들을 많이 길렀지만 개들이 싸우거나 혹은 말썽을 부리거나 하는 일은 매우 적었는데 그건 다 루비 때문이었다. 온순하고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졌던 루비. 우리 가족은 루비를 사랑했다.


그런 루비가 보이지 않았다.


아, 루비야!


노을이 지고 사방이 깜깜해지자 가족들은 루비를 찾아 집 주변과 산과 마을을 뒤지고 다녔다. 한참이 지나 집 아래 길에서 아버지가 올라오시며 우리 형제들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루비는 집 아래 소나무 숲 입구에 있던 납작한 작은 산소 옆에서 쥐약을 먹고 죽은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둠 속에서 보고 말았다. 그 늘어진 실루엣을.


루비의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더 크게 우셨다. 루비가 일부러 나가 스스로 죽은 거라며 우리들의 운명을 대신한 거라며 통곡하셨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 루비는 쥐약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장의 닭들은 전염병에 매우 약해서 아버지께선 평소 쥐를 잡기 위해 쥐약을 놓으셨다. 그래서 우리 집 개들은 쥐약을 알아 대부분 먹지 않았다. 혹 쥐약을 모르는 어린 강아지가 쥐약 가까이 가면 루비가 말리고 교육을 했다. 그런 루비가 쥐약을 먹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새로 이사 갈 집은 작은 가게가 딸린 방 두 칸짜리 집이었는데 열 마리가 넘는 개들을 어찌하냐며 부모님은 밤마다 걱정을 하셨고 개들을 다 남에게 주어야 한다는 사실에 어린 나는 화가 나 어느 날은 저녁밥도 먹지 않고 마당에서 개들과 함께 오래도록 앉아 있곤 했다. 어찌어찌 개들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지만 집을 떠난 개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해프닝이 날마다 벌어졌다. 셰퍼트 캐리는 다시 돌려보낸 후 집에 오면 우리보다 먼저 집으로 와 있곤 해서 속 없는 우리 형제들은 좋아라 했지만 부모님은 난감하고 속상해하셨다.


어머니는 루비가 그런 우리의 사정을 알아 늙은 자신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한 것이라며 우셨다. 참았던 눈물을 어머니 따라 울며 루비를 불렀다. 루비의 죽음과 함께 집을 떠나며 우리 형제들의 행복했던 유년도 끝이 났다. 착한 루비. 우리들과 영욕을 함께 한 루비. 루비는 아버지의 꿈이었던 땅에 묻혀 남았지만 우리는 집과 루비를 지키지 못했고 파란 기와집과 루비를 그리워하며 그 이후 꽤 오랫동안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비좁은 점방 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셰퍼드 캐리. 번번이 집으로 돌아왔던 캐리가 문 닫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 앞 도로에서 차에 치어 죽자 우리 가족은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았다.


'까닭 없이 짖는 개는 없다. 그러나 어느 때 짖는가를 보면 그 개가 어떤 개인지를 알 수 있다.'

 

개들은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 우리 집 개가 책을 읽는 내내 조용히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비를 생각하며 우리 집 개에게 물었다.

 "넌 어떨 때 짖니? 넌 어떤 개니?"

눈만 마주치면 좋아 꼬리를 흔드는 우리 집 개.

 "투투야, 는 지금 짖고 싶구나. 루비가 보고 싶고 아버지가 그리워서...."


유년의 우리는 부모님이 일구신 집과 주변의 산과 들에서 루비와 루비가 낳은 개들과 함께 계절마다 행복했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놀다가 더우면 땀을 씻던 작은 폭포, 청개구리 발의 귀여운 축축함, 징그러운 뱀 껍질, 산딸기, 주황색 산나리 꽃, 새큼한 싱아 잎, 온 산에 물들던 단풍과 발목까지 내리던 겨울의 눈, '아무개야, 밥 먹어라' 산에 울려 퍼지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문득 어떤 덤불 앞에서 루비가 멈칫하며 짖으면 독사가 스르륵 지나가고 우리 몸엔 닭살이 돋았다. '그 행복과 곧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처럼 완벽한 평화 속에는 본래 슬픔이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라는 '보리'의 독백처럼 루비와 지낸 행복한 유년 속에는 '본래 슬픔'이 감춰져 있었나 보다.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보리'의 주인이던 할머니의 작은 아들이 바다에서 죽자 남은 가족들은 도시 아파트로 떠난다. 배추밭을 지키기 위해 주인 할머니는 보리와 함께 남지만 곧 배추밭의 배추를 팔고 받은 돈을 세면서 돈 세는데 방해된다고 보리를 타박하는 할머니도 곧 가족이 있는 도시로 갈 것이었다. 도시 아파트에 개는 갈 수 없어서 '보리'는 필경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함께 버려질 것이다. 사람들은 '보리'가 쓰레기를 뒤진다고 생각하지만 보리는 쓰레기에서 나는 '사람들의 몸 냄새'를 맡으며 자신을 버리고 떠난 주인과 사람들이 다시 올 것을 희망한다. '쓰레기 더미를 쑤시고 다니니까 쓰레기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쓰레기 더미는 여러 가지 색깔과 향기로 나를 유혹하던 봄날의 숲과 같았다.'라고 생각하는 보리.


세상의 '보리'들아


세상은 '보리'들을 자꾸만 버리고 있다. 누구는 버리고 누구는 버려진 개들을 거둬 먹이는 이상한 세상이다. 세상이 본래 그런 건지 인간도 모자라 개들에게서도 빈부 격차, 환경 격차, 보호자 격차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 불평등은 개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람들의 문제다. 개만큼도 의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개들뿐 아니라 스스로를 슬프게 한다. 누군가는 사람의 불평등을 해소하면 개들이 처한 불평등도 해소될 수 있다고 하지만 아니다. 사람이 진정 우리 앞에 놓인 불평등을 걷어 치우고 싶으면 사람의 처분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약한 대상인 개들의 처지부터 살펴야 한다. 내가 차별받고 아프다면 다른 누구도 이미 상처받고 있는 것이니 그런 대상을 돌아보며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하는 측은지심, 연민으로 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지구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강토는 곳곳에서 버려져 있다. 나는 사람들이 못 살고 떠난 마을들을 자전거로 떠돌아다녔다... 빈 마을에서 주인 없는 개들이 울부짖었다. 개들은 못 먹어서 비쩍 말랐으나 야생에 버려져서 사나웠다.' 


작가는 개들에게 당부한다. '인간의 마을마다 서럽고 용맹한 개들이 살아남아서 짖고 또 짖으리. 개들아 죽지 마라.' 짖는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니 죽지 말고 짖으라고 한다.


우리 집에도 개 두 마리가 있다. 마당엔 블랙탄 탱이가 있고 집안엔 시골 잡종 개 투투가 있다. 탱이는 14살 늙은 개이고 투투는 이제 10개월 된 어린 개다. 탱이는 점잖고 투투는 까분다. 우리는 탱이와 투투의 밥을 준 후 밥을 먹고 서로서로에게 순하게 대한다. 개들과 우리의 일상도 사랑도 순하게 흘러가길 바란다. 탱이와 투투는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눈을 번쩍 뜨고 자면서도 귀를 쫑긋거리며 반응한다. 개들은 우리가 나갈 것인지 들어올 것인지 기분이 좋은 지 나쁜 지 알지만 우리는 개들이 우리를 아는 만큼 개들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개들은 우리를 보면 좋아하고 신뢰한다. 무서운 이빨이 있어도 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머리를 쓰다듬다가도 개를 버리고 잊어버리지만 개들은 그들과 살던 빈집에 남아 '쓰레기 더미를 헤집으며' 사람들을 기억한다. 


<개>를 읽는 내내 마음이 서늘했다. 떠난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쓰레기 속 냄새를 맡는 '보리'의 모습과 아버지 품에서 축 늘어졌던 루비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어두웠고 어른들이 보지 못하게 했지만 내 눈에 얼핏 들어온 그 실루엣은 오랫동안 꿈에 나와 괴롭고 괴롭고 아프고 슬펐다. 루비야.... 착하고 영리하고 순했던 그 눈, 그 늘어진 실루엣. 나는 문득 옆에서 자던 우리 집 개를 끌어안았다. 가슴과 배가 아주 따뜻하고 힘이 있었다. 따뜻하고 힘 있게 살아있는 우리 집 개의 체온이 내 슬픔을 데워주지 않을까. 내 슬픔이 우리 집 개의 체온으로 데워지다가 증발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 개는 나에게 순하게 안기며 그 옛날 루비처럼 캐리처럼 내 얼굴을 핥아주었다. 우리 집 개에게도 내 손과 몸의 기온이 따뜻했을까.... 나의 슬픔 말고 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어디서든 살아있을 '보리'들아. 너희들도 부디 사람들과 따뜻하거라. 따뜻해져서 그 기운으로 너희들의 슬픔이 어디론가 증발되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명랑하고 힘 있게 짖거라. 살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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