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i May 05. 2022

남편의 정년

색연필 그림일기


"ㅋㅋㅋㅋㅋ

하하하하하 꺽꺽꺽~"


남편이 웃었다. 그것도 큰 소리로 계속 웃었다. 간만에 낮잠을 자려던 나는 남편이 큰 소리로 웃는다는 게 너무 궁금해 거실로 나와 보니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아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큰 볼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제 방에서 후다닥 나오더니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며 놀라는 모양을 한다. 내가 어깨를 으쓱 하니 씩~ 웃고 들어간다. 정년을 한 남편의 변화이다.


남편은 작년 12월 말을 끝으로 기나긴 밥벌이의 출근에서 벗어났다. 그는 남은 한 달여를 손을 꼽으며 출근을 했다. 날짜가 다가오자 회사에 엄포를 놓았다고 했다. 수고했다는 등 현수막을 맞춰 걸어 놓거나 기념패를 맞추거나 하는 일 따위는 하지 말라며 세상 쓸데없는 일이 그런 일이라며 몸서리를 쳤다고 했다. 나는 뭐 그렇게까지 싫어하냐며 그런 일은 보내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며 그의 회사 동료들을 거들었으나 남편은 이상하게 싫어했다.


퇴임 날짜는 다가왔고 그는 "아이고, 시원해." 하며 앓던 이 빠진 사람처럼 속 시원한 얼굴로 무언가 잔뜩 들고 이른 퇴근을 했다. 쓰레기만 만들었다고 타박을 하며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의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웬만해선 잘하지 않는 행동이다.) 그리고 다음 날 비슷한 시기에 정년을 맞아 퇴임한 절친과 둘이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좋아하는 회나 실컷 먹고 7번 국도를 따라 동해를 일주하고 오겠다며 소풍 가는 아이처럼 짐을 싸고 카메라를 챙기며 친구와 몇 번이나 톡을 하고 뭐는 어디 있냐며 정신없이 집안을 왔다 갔다 했다. 몇 시간 후 남편은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 내게 보내주었다.


남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프나 안 아프나 출근을 했다. 그는 버는 돈의 10%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위해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곤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월급은 박봉이었으나 우리가 크게 빚을 지고 살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남편이 자신의 소비에 인색했다는 데 있다. 기나긴 밥벌이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을 위한 일상이 아니라 그저 버티는 일상을 살았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재미없는 시간인지 나 역시 그런 시간을 지나왔기에 잘 안다.


그는 늘 과묵했고 늘 나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었으며 무엇보다 크게 웃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종종 남편이 화가 난 게 아니냐며 내게 슬쩍 묻곤 했을 정도로 무표정하고 말이 없던 그였다. 술자리에서도 일찍 귀가하는 사람이었고 아파도 아프다는 말이 없었다. 속상한 일이 생겨도 특유의  무표정 뒤에 마음을 숨겼고 회사에서의 일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좋은 일이 달아날까 봐 입에 올리지 않았고 나쁜 일은 혼자만 알고 겪으며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웃는다. 과묵하게 희로애락을 혼자 간직하던 그가 드라마를 집중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많아졌다.

   "아버지 말이 엄청 많아지셨네. "  

큰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작아들이 제 아버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아버진 그동안 그저 피곤하셨거야."

 말에 우리는 TV를 보며 웃고 있는 남편처럼 웃을 수 없었다. 우리의 가슴속으로 스산하고 짠한 바람이 지나갔다. 마음이 통했나보다. 두 아들다가가 말없이 제 아버지를 앞뒤에서 끌어안아 주었다.


은퇴 후 늦잠을 즐기고 계획하지 않은 여행을 다니던 남편은 탁구장에 회원 가입을 하고 전부터 하고 싶던 목수일을 배우겠다며 목공 수업을 다니고 있다. 그리곤 무슨 무슨 자격증을 따겠다며 도시락을 부탁한다.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남편이 정년을 맞아 비로소 젊은 에너지로 살기 시작했다고 느낀다. 정년은 그에게 사회생활의 끝이 아니라 긴 노동에 대한 휴식이자 해방이다. 정년 후에도 밥벌이를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적어도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남편을 축복하고 싶다. 그가 수동적인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나는 기쁘고 더불어 자유롭다.


당신 진정 애썼어요. 당신의 하루하루가  당신의 원의대로 이루어지길 기원하리다. 이 기원 담은 도시락 잘 드시고 건강하게 지내시구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발자국 찍으며 달려온 길, 장한 길....'



이전 05화 요즘 나는 부러운 것이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