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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Jul 07. 2022

요즘 나는 부러운 것이 없다

색연필 그림일기 2


어반 스케치에 관한 그림을 싣기 위해 매거진을 새로 하나 만들었다. 제목은 <어반 스케치 그리고 쓰다 >라고 지었다. 상투적인 제목이긴 하지만 나는 좋다. 제목 중간의 '그리고'라는 단어엔 이중의 의미를 둔다. 접속사의 의미와 동사의 의미다. 색연필 그림일기의 그림과 별도로 어반 스케치에 해당하는 그림을 이 매거진에 모아 둘 생각이다. 펜 드로잉, 색연필, 수채화 등을 다양하고 꾸준하게 그리고 싶다는 것이 요즘 나의 소망 중 하나다. 평가를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평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오직 나만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이게 뭐라고, 책을 내는 것도 아닌데 새 매거진 주소를 만들며 즐겁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나는 부러운 것이 별로 없다.


나는 곧 60이 된다.  2, 30대엔 60의 나이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로 잠깐만에 나는 60이 되었다. 60에 이르고 보니 20대의 연애로 인한 번민은 물론 억울하고 치열한 세상과의 투쟁이 없어 좋다. 육아로 인한 30대의 전전긍긍도 없고 가족을 위해 견뎌야 했던 4, 50대가 아니어서 더더욱 좋다. 수입은 줄었지만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늘 원하던 그림을 그리며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된 지금 부러운 것이 졸지에 사라져 버렸다.


나이 들어 좋은 것 중의 또 하나는 명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38살이나 43살쯤 혹은 50살에 지금처럼 그림이나 그리며 한가롭게 지내겠다고 하면 세상은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한참 크는 애들은 어쩔 거냐, 남편 혼자 벌어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겠냐, 집은 안 살 거냐 하며 비난이 쇄도할 것이다.


    "에이,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해야 건강에도 좋고 돈도 벌고 좋잖아."


100세 시대에 60은 젊은 나이니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다며 내게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어쩌라구 내 맘인데"의 마음이다. 이 또한 선택인 것이다. 다행히 그래도 된다며 남의 편이 아닌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나는 운이 좋다. 소설을 쓰는 내 친구는 나이 먹은 지금이 좋다면서 어쩌면 살면서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다고 말해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ㅋㅋ 옆에서 남편들이 조개를 구워주고 있었다). 친구는 술잔을 비우며 "근데 우리 아직 안 늙은 것 같다. 이렇게 거뜬히 술을 비워내고 있잖아." 하고 말해 우린 또 밤바다를 바라보며 깔깔거렸다. 60에 이른 지금 20대보다 몸은 늙었지만 그때와 다름없이 우리는 자식 얘기나 시댁 얘기가 아닌 글쓰기와 그림, 여행과 노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젊은 날에 맛볼 수 없었던 편안함과 한가로움을 만끽했으니 무얼 더 부러워할까.  


     "가진 게 많아 한가롭게 사는 거지."

 

이에 대한 변을 달자면 '안분지족'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며 더 바람 없이 주어진 것에 만족한다는 말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언제 갚을지 모르는 은행빚이 있고 통장 잔고는 깃털처럼 가볍지만 지금 나는 내 처지에 만족하고 있다. 삶이 또 언제 내 뒤통수를 칠 수 있으니 가능한 이 한가로움을 즐겨야겠다.   


    "도대체 집에서 맨날 뭐 해? 집에만 있으면 며느리가 싫어해~에~."


결혼 후 분가했던 큰아들이 최근에 집으로 들어와 사는 걸 보고 주변에서 염려로 하는 말이다. 내 집에 내가 있는데 며느리가 싫어할 것을 근심해야 하다니 참 쓸쓸한 말이다. 그러나 남들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다행히 선견지명이 있어 우리는 집을 지을 때 큰 평수와 마당을 포기하고 별채를 하나 더 지었다. 남들 집 한 채 짓는 공간에 우린 두 채를 지은 것이다. 이층을 올리는 비용보다 훨씬 저렴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 내외의 집과 우리 집은 독립되어 있고 아들 내외도 바쁘지만 나 역시 무언가 하느라 애들을 볼 시간이 별로 없다. 


     " 아니, 벌써 해가 지네."


텃밭 당귀에 꽃이 한창이었다. 따다가 튀김을 해 먹고 강아지 투투와 실랑이를 하다 보니 해가 졌다. 브런치 하나 꼭 퇴고해야지 하고 간신히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어제 만들다 만 행주가 눈에 띈다. 자투리 천과 수실을 꺼내고 다시 바늘을 잡는다. 그러면서 무얼 그릴까 생각하느라 분주하고 그림을 그리며 글을 생각하느라 또 분주하다. 학생들의 온라인 수업이 끝나는 늦은 밤 나는 다시 거실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쓰고 낮에 봐 둔 그림 자료들을 훑어본다. 소재를 고른 후 스케치를 하고 색을 칠하는 사이 밤이 깊어간다. 별 일 없이 빈둥대는 것 같은 나의 하루는 사실 매우 분주하다. 그래서 나의 한가로움은 분주함이다. 나의 이 분주함을 사람들은 모르고 공연히 안 해도 될 며느리 걱정과 내 밥을 걱정한다. 여전히 세상은 말이 많고 비로소 그 세상과 거리를 둔 나는 아무 일 안 해도 분주하니 부러운 것이 별로 없다.



어반 스케처라면 누구나 한 번은 그린다는 초원 사진관. 핀터레스트 사진을 보고 그림. 파브리아노 14.8 ×21 Faber Castel 색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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