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 산딸기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비가 그치고 햇빛이 쨍하다 못해 강렬해 눈을 뜰 수가 없다. 초록 식물들은 아주 살판이 났다. 비도 충분히 내렸겠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왕성하게 자란다. 하루에 다섯 번 오가는 버스 정류장 부근 숲은 비 온 후 더욱 우거지고 녹음이 짙다.


처음엔 그저 풀인 줄 알았다. 이름 없는, 아니 세상에 이름 없는 것이 있을까만 잡풀이라고 여기면 굳이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는 그런 잡풀들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빨간색 열매를 보고 알았다. 산딸기였다. 어렸을 때 언니와 함께 따던 산딸기!

그러고 보니 잎이 낯익다.


아버지는 큰 양계장을 운영하셨다. 큰 댁 오빠들까지 일꾼이 10명인 꽤 큰 양계장이었다. 마을에선 우리 집을 윤대위집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께선 전직 군인이셨다. 지금이야 수도권에 속해 집이며 땅이며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지만 당시는 서울 변두리에 속하는 후미진 곳이었다. 군부대가 많은 동네였고 동네 규모 또한 작았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올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있어서 우리 형제들은 강아지들과 함께 집 주변의 산과 들에서 뛰어놀았다. 싱아가 덩굴을 이루고 초여름이 시작되면 어머니께서 우리 자매에게 예쁜 바구니 하나 씩 쥐어주면서 산딸기를 따오라고 하셨다. 집 주변엔 산딸기가 흐드러졌다. 바위를 타고 산딸기들은 반짝거리는 보석처럼 다닥다닥 열려 있어 자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우리 바구니는 금세 가득 차곤 했다. 산딸기를 받은 어머니는 '우리 아가들 재밌었지?' 하며 설탕을 뿌린 산딸기를 간식으로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싱아가 얼마나 시었는지, 뱀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폭포에 물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수선스럽게 얘기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일꾼들에게 산딸기와 막걸리를 함께 내주시며 우리가 얼마나 큰 모험 끝에 산딸기를 따왔는지 말해 주셨다.


뜻밖의 산딸기를 보니 부모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젊었던 아버지, 어머니, 아빠, 엄마...

아버지는 살결이 하얬다. 오늘처럼 해가 강한 날엔 라이방이라 부르던 선글라스를 끼셨다. 아버지는 산딸기를 드시며 우리를 보고 웃으셨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라이방 검은빛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우릴 보고 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보고 싶은, 아버지....

딸은 세월을 지나 나이를 먹었는데 여전히 철없는 딸이라 돌아가신 지 13년이 되었다고 자꾸 아버지를 잊는다....

백발로 남으신 어머니.

작은 몸이 더 작아지신 어머니.....

어머니가 작다고 느끼지도 못했던 시간이 산딸기의 기억과 함께 흘러간다. 흐드러지게 군락을 이루던 산딸기는 '누가 다 먹은 것일까'. 산딸기도 나를 사랑하던 아버지도 이젠 없다.

행복했던 나의 유년이 산딸기 안에 있었구나. 산딸기를 따던 곳엔 작은 폭포가 있었고 그 폭포 위엔 내 얼굴의 주근깨 같은 까만 점이 점점이 박힌 붉은 나리꽃이 군락으로 피어 있었다. 그리고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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