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시작한 나에게 며느리가 선물을 했다. FABER CASTELL 60 컬러 색연필이었다. 12가지 색연필로 그림일기를 쓰고 있던 내게 다양한 색이 필요할 거라며 선물을 한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니 12색 연필은 옹색해 보였을 것이다. 색연필을 보는 순간 처음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화방 사이트에 들어가 이것저것 눈으로만 보고 침을 흘리던 차였다. 36색 까지는 어떻게 사볼까, 했지만 60색은 가격도 그렇고 내가 사용할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몇 번 욕심만 내다가 만 물건이었는데 며늘 아이가 어찌 알고 선물을 한 것이다.
며느리가 선물한 60색연필
대학에 들어가기 전 나는 미대를 가고자 희망했으나 어머니께서 말리셨다. 여자는 가정과나 영문과를 가는 거라고.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화실 수업료를 주실 수 없었던 거다. 나는 펜 하나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국문과에 진학했다. 틈틈이 시를 썼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또 밥벌이가 우선이어서 시니 그림이니 하는 것들은 묻어두었다. 결혼하고 아들 둘을 보았고 이 아이들이 모두 미대에 진학했다. 아들들은 신변의 일을 주로 그림으로 기록했는데 그 그림을 보는 것은 나의 기쁨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심 부러웠다. 그림을 그려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이 자유로워 보였다. 실제로 그 애들은 그런 면에서 매우 자유로웠고 자신들의 감정 표현과 세상 속에서 또 그만큼 풍요로웠다.
아들의 그림
인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갱년기가 왔고 육체와 감정의 변화를 감당해야 했다. 게다가 기대가 컸던 큰 아들이 예상보다 일찍 결혼을 하면서 나는 남모를 상실감에 몰래 아팠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자 생활이 무너졌다. 육체는 물론 내면까지 피폐해졌다. 집 앞 숲길을 걸었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려 넣었다. 아들에게 감수를 받았다. 아들은 말없이 웃으며 엄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며늘 아이가 색연필을 사들고 왔다.
"어머니, 앞으론 이 색연필로 더 다양하게 표현해 보세요. 응원할게요. "
라며.
60색 연필은 12색이나 24색에 비하면 놀라운 세계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살면서 60색을 갖춘 도구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감히......' 하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아무나 사용하지 않는 거라고 여겼다. 예술가들,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런 도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주어졌다.
나는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하자고 하지 말자. 그저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은 날 그리면 되는 거다. 이 색연필 수만큼 그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