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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리 Oct 22. 2023

내가 늘 자연스럽게 해오던 일,
나에게 어울리는 삶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알록달록한 문구류와 조금은 쓸데없지만 나를 설레게 해주는 소품들, 예쁘고 아늑한 카페, 평범하지 않은 물건들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걸 왜 사…?“라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질문을 종종 받았었다. 필요하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구매하는 일이 누군가는 낭비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정도면 나의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아주 작지만 의미 있는, 괜찮고 쓸데 있는, 조금은 뿌듯한 낭비가 되었으면 한다.


오히려 큰 지출보다 작은 지출 앞에서 더 고민하고, 낭비인지 아닌지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내가 그랬었다. 아이패드를 샀을 때 보다도 다이소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훨씬 많이 보냈던 것 같다. 아이패드는 필요한 물건이지만 다이소에서 구매한 작은 스티커는 필요보다는 소장하고 싶어서인 이유가 더 컸으니, 왠지 사람들이 이런 것을 낭비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은 다 다르고, 나는 이런 것들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니 내 마음에 집중하고 당당해지기로 했다. 비싼 옷과 액세서리로 나를 꾸미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좋아하는 색감의 노트 한 권과 귀여운 스티커들로 충분히 행복해지는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래도 비싼 명품으로 나를 꾸미는 것에 비하면, 작은 스티커로 노트를 꾸미겠다는데 이 정도면 낭비도 아니지!


그러다가 글을 쓰는 사람을 만나거나, 너무나도 공감이 되다 못해 나의 심장을 뛰게 하는 책을 만났을 땐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당장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하며,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 겹치기 마련이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썼다고 말하지만, 심지어 내가 더 먼저 했던 생각이라 해도 그게 남들보다 조금 늦었다면 나는 그저 먼저 그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은 어떤 이를 따라한 사람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느린 사람은 괜찮지만, 누군가를 따라 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느린 것은 괜찮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래서 늘 불안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면 뭐 해, 내가 이렇게 미루는 사이에 누군가는 벌써 그 이야기를 쓰고 있을 텐데.’ 내가 늘 하고 싶었던 그림도, 문구도, 디자인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래서 앞서 말했던 '어떤 이의 무언가'를 보고, 설레면서도 동시에 불안하다.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하고 싶은 일과 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관련된 책이나 영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변을 맴돌고만 있었다. 뭐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단순하게도 문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 또한 결국 창업의 길로 이어진 것이었다. 문구라고 생각했을 땐 늘 해오던 일과 관련이 있어 친근하고 가까워 보였는데, 이게 곧 창업이라고 생각하니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막상 가본 적 없는 길을 가려하니 낯설고 겁이 났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없도록 더 완벽하게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내가, 정식으로 완벽하게 해야겠다고 마음까지 먹었으니 얼마나 거북이처럼 느리게 한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는지. 가끔 물어볼 때마다 발걸음을 뗀 지가 언제인 그 한 발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여전히 같은 위치에 있던 나에게, 남편이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었다.


“문구보다는, 글을 계속 써보는 건 어때?”


이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오히려 글 쓰는 작가가 되는 길이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모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랫동안 좋아하고 늘 꿈꿔왔던 것은 글을 쓰는 삶이었다. 그러나 내가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분야였고, 진지하게 이 길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문구를 만드는 일도 네가 결국 잘 해낼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 삶이 네가 꿈꾸던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과는 다르잖아. 예전에 디자이너로 직장 생활하면서 정신없이 일에 치이고, 결국 번아웃이 왔던 것처럼 그 삶이 또 반복될 텐데… 창업을 해서 사장이 되면 그때보다 훨씬 바쁘고 일에 치이면서 살게 될 거야. 그럼 금방 지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글 쓰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여유가 될 때마다 네가 만들고 싶었던 문구를 하나씩 만들어봐도 좋을 것 같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꿈꿔왔는데, 창업은 여유와는 전혀 반대되는 삶이다. 남편은 오히려 내가 문구를 만드는 것보다도 글 쓰는 일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더 잘하는지의 능력을 떠나서, 문구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후로 아직까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는 것에 비하면 글과 사진은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어렵지 않게 기록해 왔고 최근에 브런치 작가로 합격까지 했으니 내가 더 잘하는 일이 맞고 지금으로서는 더 가까이에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나의 능력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는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글 쓰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생각하니 설레기 시작했다.


나는 글, 그림, 사진촬영, 영상제작, 캘리그래피, 디자인, 커피, 음악 등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많은 결과물이 있고,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놓지 않고 틈틈이 해오던 것만 남겨보자면 글을 쓰는 것과,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놓치기 아까운 순간들을 습관처럼 글이나 사진으로 기록해 왔고, 기록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점점 쌓여갈수록 마치 숙제를 안 한 것처럼 찝찝하고, 불안하고, 괴로웠다. 나는 기록을 반드시 해야 하는 숙제처럼 여겨왔다. 기다려지고, 기대되고, 나를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의미 있고 재미있는 내 삶의 숙제. 덕분에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많은 것이 아마 글과 사진일 것이다. 핸드폰 메모장과 각 노트마다 흩어져 있는 수많은 글들, 핸드폰 사진첩과 외장하드에 넘쳐나서 정리가 되지 않는 수많은 사진들. 이로써 숙제가 하나 추가되었다. 기록을 정리하는 것. 늘 습관처럼 해오다가 어느새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자산. 그 일을 이제부터 더욱 진지하게,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했다.


나는 글 쓰는 것과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그림도 그리고 싶었고, 문구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시작하려고 하면, 가장 어렵고 진행이 더딘 것은 그림과 문구였다. 너무 완벽하게 잘하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뭘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림과 문구에 대한 참고자료는 정말 많이 모아 왔고 문구 여행도 다녀왔지만, 결국 내가 해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글과 사진은 이미 내가 해낸 것들로 가득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일은 나에게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고, 문구를 만들어내는 일은 힘이 잔뜩 들어가서 나에게 자연스럽지 않고 시작조차 어려운 일이다. 남편의 말대로 내가 자연스럽게 늘 해오던 일, 내가 어렵지 않게 도전하고 결과물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일, 더 자신 있어하는 일은 글과 사진이었다.


마치 버킷리스트처럼, 나는 언젠가 책 한 권을 내보는 것이 꿈이라고 늘 말하고 다녔다. ‘작디작은연구소‘를 만든 이유도 작가가 되고 싶어서였지만, 아직도 글을 쓰는 것은 그저 멀리 있는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글을 쓰고 여러 권의 책을 내고 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아서 글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작디작은연구소’는 어느새 기획 의도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연구할 수 있는 나만의 작은 방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나는 하마터면 사장이 되어서 아주 바쁘고 정신없이 살 뻔했다. 나는 대체로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에 대한 책과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평상에 앉아 기타를 치고,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길을 걸으며 영상을 찍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나에게 문구 브랜드를 운영하는 바쁘고 치열한 삶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선택하려고 하니,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계속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초점이 맞춰지자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하게 그려졌다.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고 싶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질투가 난다면, 그게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내가 만약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면,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거나 내가 꿈꾸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술가였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도 좋아하는 일로써 먹고사는 사람들. 크게 성공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너무 부럽다.


나는 너무 분주하다. 어쩌다 마음에 와닿는 글을 보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도 빨리 글을 써야지!’, 귀여운 그림을 보면 ‘나도 그림을 그려봐야지!’, 예쁜 문구와 디자인을 보면 ‘와! 나도 해봐야지!’, 우연히 작고 예쁜 카페를 보면 ‘나도 얼른 카페를 차려보고 싶다! 일단 카페 알바를 알아볼까?'하고 자꾸만 기웃거리느라 하나도 제대로 해낸 것이 없었다. 이젠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나도 나의 것을 해내야지. 아무리 멋진 것을 보아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내야지. 중심을 잃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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