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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Nov 23. 2017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XXⅣ

'자율하다'


 삶에서 의미 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일들 중에는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의미 있는 가치란 항상 새로이 창출하는 것이고 행복 또한 사력을 다해 쟁취해내야 하는 것이므로. 인생의 보물들이 모두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주어진다면 좋겠지만 소중함이란 늘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싹트곤 한다. 결국 우리는 쉽게 주어지는 무언가에 대해 깊은 소중함을 갖지 못한다. 미운 정이 든다는 개념도 방향만 반대일 뿐 비슷한 원리로 성립다.


 장광설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번 글을 쓰기 시작하기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간, 깊은 고민, 수 없는 주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명확한 답보다는 지금까지 잘못짚었거나 간과한 부분들을 찾아내어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잠시 잊은 채 시간을 흘려보낼 심적인 여유가 필요했다.


이렇게 늘 함께 하는 우리도 가끔은 서로가 어렵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함을 두고 우리는 '함께 한다'라고 표현한다. 이에 따르면 각 존재가 속한 시공간의 겹침이 곧 '함께'의 가장 적절한 정의인 것처럼 보인다. 늘 그렇듯, 이론은 그렇다.


 현실은 이론과 다르다. 그저 공존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서로 다른 존재가 진정 삶을 함께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언어적인 존재(나와 제노 엄마)와 비언어적인 존재(아직은 어린 햇살이와 제노) 사이의 간극, 어떤 대상에 관한 긍정적인 경험(예를 들자면 개를 길러본 경험)이 있는 이와 없는 이의 간극, 혹은 부정적인 경험(예를 들자면 개에게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는 이와 없는 이의 간극, 선입견을 가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사이의 간극 등 우리는 늘 상대와의 차이를 메우려 노력하거나 혹은 이를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곤 한다.


 이번 제 34회차 이야기는 이제껏 연재해 온 글들 중 작성하는 손가락이 가장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 각자의 삶 사이에 놓인 간극과 그 괴리감이 예상보다 훨씬 깊고 냉혹하다는 사실을 체감한 탓이었다.




시선


 상대적으로 커다란 개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덩치와 함께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바로 주위의 시선이다. 제노를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 마냥 신기하고 좋아하는 우호적인 시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시선, 제노는 물론 견주인 나까지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시선 등 바깥세상의 반응은 실로 다양하다. 이러한 시선들 중 호기심과 관심 등 제노를 향한 우호적인 시선에는 이제 상당히 익숙해졌다. 때때로 개를 싫어하는 분들이 보이는 비우호적인 시선에도 나름대로 적응이 되었다. 약 80%에 달하는 이 두 종류의 시선은 이제 거의 의식하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일 무서운 건 무더위에 맹추위에 산책 나가자고 조르는 김제노의  뜨거운 시선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의식하고 신경을 써야 하는 시선이 하나 존재한다. 바로 두려움의 시선이다. 어떤 대상을 싫어하는 것과 무서워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쉽게 말해 개를 싫어하는 분들을 길에서 마주치면 우리를 흘겨보거나 수군거리면서 지나쳐 가지만, 개를 두려워하는 분들은 멀리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른 길로 돌아서 가거나 우리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한때 나 역시 개를 무서워했던 한 사람으로서(어릴 적 집에서 기르던 도베르만이 너무 덩치가 크고 표현이 과격해서 마당을 오갈 때마다 할아버지가 매번 나오셔서 녀석을 붙잡아 주시곤 했다) 그 마음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해한다. 그런 분들을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괜스레 죄송스럽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든다.


 사실 나는 여전히 동물들에 대한 두려운 시선을 간직하고 있다. 어릴 적 기르던 도베르만이 놀자고 달려드는 걸 피하다가 양 무릎이 깨져 아직도 큰 흉터가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직접 데려온 유기견에게 물린 적도 있다. 심지어 집에서 기르던 앵무새를 쓰다듬어주다가 부리에 물려 손가락이 관통된 적도 있다(앵무새 부리의 공격력은 거의 공룡 수준이다). 어제저녁 제노를 산책시키고 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수컷 로트와일러(제노보다 한 뼘은 컸고 아마도 몸무게는 두 배쯤?)는 반려견이라면 정신 못 차리고 좋아하는 내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고, 순간적으로 제노를 확 잡아당겨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늘 나 자신의 조심성이 부족해 경험한 일들이긴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동물에 대한 조심성과 신중한 태도를 갖게 해 주었다.


근력과 체력, 시간이 널럴한 분들이 아니라면 시베리안 허스키와 함께 하는 삶은 조심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희생자는 나 하나인 걸로..)


 배변물을 수거하지 않거나 목줄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는 등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견주들에 대한 힐난이나 부정적인 여론 및 시선은 늘 있어왔다. 동시에 자기 앞가림을 열심히 하는 견주들을 향한 시선은 반려견을 향한 호기심 및 관심과 어우러져 크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분위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물결 표시는 일련의 사건들을 뜻한다 - 가정의 반려견이 어린 아기를 공격한 사건이라든지, 호텔링 맡긴 시베리안 허스키가 다른 소형견을 공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라든지, 최근까지 떠들썩했던 모 연예인의 반려견 사건이라든지..]


 지난여름은 유난히 길고 무더웠다. 특히 견주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태풍이 몇 차례나 휩쓸고 간 듯한 계절이었다. 쉽게 말해 반려견 문화에 '혼돈'이라는 이름의 태풍, '초토화'라는 이름의 허리케인이 다녀간 것이다. 연이은 부침을 겪으면서 반려견들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은 다소 경계하는 시선으로, 무관심하던 시선은 걱정과 불안을 담은 시선으로, 부정적이던 시선은 더더욱 냉혹한 눈초리로 바뀌어버렸다.

 



반응


 사회의 부정적인 여론이나 타인들의 달라진 시선에도 나는 제노의 야외 배변 습관 탓에 무조건 하루에 세 차례 산책을 강행해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무튼 맨날맨날!!!!!!!!!!!!!!!!!!!!!!!!!!!!!!!!!!!!!!!!!!!!




바깥세상의 반응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우선적으로,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기에 최적인 가을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산책을 하는 분들이 크게 줄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 탓인지 평소라면 하루에 한두 차례씩 마주치는 제노 친구와 견주분들도 사흘에 한번 꼴로 만날 정도였다. 많은 견주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위기감이랄까 압박감에 산책 빈도를 줄인 듯했다. 실제로 꾸준히 산책을 다니며 마주친 견주들 중엔 요즘 들어 강아지 산책시키기가 너무 눈치 보이고 가끔은 무섭기까지 하다는 분들도 있었다.


 목줄도 잘 착용하고 배변도 곧바로 수거하는데도, 심지어는 사람 없는 곳만 골라서 다니는 데도 굳이 다가와서 삿대질을 하며 별다른 이유 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어떤 견주분은 따님이 혼자서 개를 산책시키다가 그저 큰 개를 키운다는 이유만으로 심한 말을 듣고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면서 속상해하셨다.


 어느 애견 호텔에서 벌어진 시베리안 허스키의 공격 사건 이후 제노의 친구인 니클라스의 견주분은 그냥 길을 가던 중 다가온 어떤 노인에게 온갖 손가락질과 고래고래 욕을 들었다고 했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다만 당시 뉴스에 나온 것과 같은 견종이었던 탓이라고 유추해 볼 뿐이었다.


 제노 친구 중 어리고 활발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얼마 전 산책 도중 목줄 관리를 똑바로 하라면서 거의 폭행을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목줄은 늘어나는 5m짜리 자동 목줄이었다.  


 반려견은 화물 전용 엘리베이터에만 탑승시키도록 되어 있는 인근 아파트에서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했음에도 이웃 주민과 큰 싸움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견주로서는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시비를 걸어오니 답답한 노릇이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한 이웃 주민 입장에서는 얼마 전 벌어진 사건의 잔상이 떠올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무책임한 행동과 관리로 인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끼리, 이웃끼리 얼굴을 붉힌 채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제노가 코 잠든 사이에 세상이 변해버렸어..


 중 대형견을 기르는 견주인 동시에 제노가 아닌 다른 동물들에게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으로서, 양쪽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지금은 제노와 한가족으로 살아가지만 한때 개를 싫어하던 시절에는 큰 개는 피해 다녔고(사실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작은 개도 대체 왜 기르는 건지 모르겠다며 이유 없이 싫어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민감한 시기의, 어쩌면 당연한 사회적 반응에 나로서는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몇몇 존재한다.


 눈치를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 이후의 반응들을 기술한 위의 문장들은 하나같이 '~했다고 한다.' 혹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와 같은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평소 친하게 지내는 견주분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인 것이다. 실제로 나는 제노를 데리고 산책을 하면서 아직까지 아무런 부침을 겪은 적이 없었다. 다른 견주분들이 조심하자고, 요즘 산책 다니는 거 괜찮냐고 물어올 때면 아,, 그런 일들도 있구나,, 할 뿐이다.


 한번은 제노가 얼핏 사나운 늑대처럼 보이고 제노 아빠도 덩치가 큰 젊은 남자이다 보니 뭐라고 못하고 사람을 가려서 시비를 거나 보다, 우리는 그런 사건들 이후로 최소 서너 번씩은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웃어넘겼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여름에 온 가족이 산책을 다녀오면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한참을 밖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햇살이가 갈증이 났는지 유모차에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마침 상가 근처를 지나고 있던 터라 나는 제노의 목줄을 잠시 제노 엄마에게 맡기고 생수를 사러 편의점에 후다닥 다녀왔다. 편의점 밖에는 유모차에 탄 햇살이, 제노, 그리고 목줄을 들고 있는 제노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더운 날이어서 계산을 기다리는 줄이 조금 긴 편이었는데 그 사이에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 테이블에서 술을 한잔 걸치던 어떤 중년 남성분이 제노를 향해 이리 와보라며 자꾸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햇살이가 유모차에서 졸면서 짜증을 내던 상황이어서 제노 엄마가 그만 하시라면서 거리를 두었지만 남성분(취해서 심신 미약 상태셨는지)의 무례는 계속되고 있었다. 황급히 계산을 마친 나는 편의점 밖으로 나가 그 남성분에게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그러다가 개가 달려들면 어떡하실 거냐고 당장 그만두시라고 했더니 잠시 나를 흘깃 보더니 아무 말 없이 혼자 막걸리를 재개하셨다. 내가 제노를 제노엄마한테 맡기고 곁을 비운 단 3분 가까운 사이에,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수천 차례의 산책에서 단 한 차례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결심했다. 햇살이가 커도 혼자서 제노 산책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또한 절대로 다른 이들의 눈총을 사는 견주가 되지 않겠노라고. 마지막으로 제노 엄마가 혼자 제노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일이 없도록 건강해야겠다고.


 

제노 오빠 리드줄을 탐내는 햇살이





반성


 세상에 어떤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을 때, 혹은 태풍이 휘몰아칠 때 이에 대해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이번 여름을 보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없이 들이닥치는 1파, 2파, 3파, 그 반복에 우두커니 서서 너덜너덜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는 비단 나뿐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다른 견주들도 마찬가지로 느꼈을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무력 속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잠시 주저앉아 지나 온 길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 정도였다.


 

너도 같이 반성하자 김제노 (욕실 문에서 햇살이 목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음)


[착각]


 일반적으로 견주들이 갖는 가장 큰 착각들 중 하나가 바로 '내 눈에 예쁘고 귀여우니 다른 사람들 눈에도 예뻐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현실을 말하자면 우리 개의 모습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그 누구에게도 내 눈에 비치는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다. 그 절반만 가도 행운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러한 착각으로부터 결백했을까 자문해보았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종종 제노의 겉모습을 보고 길을 피하는 분들을 보게 된다. 결코 다행은 아니지만 그러한 경험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제노를 예쁘게 보고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은 털끝만큼도 갖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져서 제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에게도 녀석이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게 단단히 제어한다. 반려견이란 우리 눈에는 꿀단지 복단지이겠으나 누군가에겐 독단지 말벌 둥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존재이므로, 항상 조심과 신중은 아무리 기울여도 부족한 법이다.


자기 외양에 대한 자각 0% (아직도 자기가 2kg인 줄 알고 안아달라고 들이민다)


자기 평가 : 10/10 - "제노야, 제노는 다 좋은데 가끔 좀 못생겼어." (과연 진심일까)



 [책임]


 견주의 책임은 광범위하다. 작게는 배변을 치우는 일부터 크게는 일생 동안 이루어지는 훈육 그 전체가 책임의 범위이기 때문이다. 현재 반려견 문화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들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견주의 책임의식으로부터 기인한다.


- 견주의 반려견 훈련 책임(= 반려견 사회화, 행동 및 태도 훈육)

- 반려견 산책 및 외출 시 에티켓 준수(목줄, 배설물 수거 등) 책임

- 견주의 반려견 운동량 관리 및 산책 책임 (=반려견이 혼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노력)

- 견주에게 주어진 가장 막중한, 끝까지 반려견과 함께 한다는 책임


 사실 이 네 가지만 잘 지켜져도 사회는 반려견 문제로 아무런 홍역을 앓지 않을 것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그조차도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추석 선물로 들어온 배를..... 다 먹었다구요!?" - "그래, 바로 네 녀석이"


자기 평가 7/10 : "제노는 분명 바른 청년으로 자랐다. 다만 다소 지나치게 엄한 아빠 아래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시베리안 허스키에 관한 서적들을 미리 접한 바 있던 나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고집스러운 허스키 종의 자견 시절 훈련 및 훈육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을 질리도록 접했다. '처음 6개월 열심히 훈육해서 편하게 살래, 아니면 그때 내버려두고 10년 넘게 고생할래?'와 같은 뉘앙스를 띈 반 협박에 가까운 어조였다.



 [솔선]


 견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가장 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연재를 통해 반려견 문화, 유기견 문제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고 고민거리를 풀어내기도 했다. 허나 정작 피부에 와 닿는 현실 속 견주로서 반려견 문화가 올바르게 자리 잡도록 노력한 것이 무엇인가 떠올려 보면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다. 굳이 꼽자면 유기견들이 새로운 가정을 찾을 수 있도록 중간에 몇 차례 다리를 놓은 정도밖에 없었다(다행히 모두 대성공적인 입양이었다).


 제노의 배변을 잘 치우고, 소변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을 장소를 골라 소변을 보게 하고, 인근을 지나는 행인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목줄 관리를 철저히 하며, 제노가 다른 반려견이나 견주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 부분들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 왔고, 이제까지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다.


"제노야,, 네가 아무리 거기서 죽치고 있어도 배는 정말로 다 먹었다니까?!" - "........"


 하지만 이제껏 다른 견주와 그 반려견의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들을 목격하고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저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만 할 뿐 굳이 지적을 하지 않았다. 늘 마주치는 이웃이니까, 굳이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저 입 다물고 넘어갈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끄러운 사람과는 거리가 멀지만 모든 것이 나비효과처럼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침묵이, 나의 침묵이 일조했다는 일말의 책임감이 든다.


'진정으로 사회를 죽이는 악(惡)은 시끄럽고 말 많은 선동꾼이나 정치가들이 아닌, 자신을 선하다고 믿는 침묵하는 다수이다.'


자기 평가 3/10 : "나만 잘 하면 될 거라고 믿었지만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더라. 억울하지만은 않아. 늘 입 다물고 있던 내 책임도 있으니까."





자율自律(하다)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일을 두고 '자율自律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율이란 칸트가 논한 철학적 정의가 아닌, 보다 일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생존 및 사고방식으로서의 자율을 말한다.


 갓 태어나 이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반려견 문화에 있어 지난여름은 그야말로 악재이자 시련이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건과 그 시기에는 저마다의 이유와 함의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일련의 사건과 반성을 통해 우리는 반려견 문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제도적인 틀을 마련하는 데 시동을 걸 수 있었다. 또한 일부 견주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대다수의 견주들 또한 다소의 긴장은 있을지언정 전보다 책임의식과 경각심을 갖고 사회 속에서 반려견과 함께 하게 되었다. 지나간 태풍과 허리케인의 시간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어떤 '계기'가 된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어떤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며 선을 어디쯤 그어야 할지에 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시대와 인심을 역행하는 순간도 찾아올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모든 것이 불분명한 지금 나를 포함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율自律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반성은 지나치게 과거에 놓여 있고 다짐은 너무 앞서기에.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제노 엄마, 화통에 실수로 핵연료를 쏟은 듯한 폭주기관차 햇살이와 달리 나와 제노는 상당히 게으르고 굼뜨다. 둘 다 틈만 나면 거실 여기저기에 큰 덩치로 널브러져 있고 산책을 나갈 땐 매번 30분 가까이 꿈지럭 꿈지럭, 나가기 귀찮다고 툴툴대다가 어기적어기적 현관을 나서곤 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우리 가족 구성원 간의 케미스트리는 새삼 완벽에 가까운 것 같다. 이제야 조금 가족 그림에 안정을 찾은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은 멀다.


 이번 34화를 쓸 수 있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잠시간의 절필이나 다름없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고, 또 고민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비었던 잔이 다시 넘쳐흐를 것처럼 가득해진 기분이다. 요즘은 제노와 동네 산책을 하다가 마주치는 분들이 종종 "제노 이야기는 언제 또 올라와요?"라고 물어 오신다. 아무도 모르는 대나무 숲을 향해 외치는 양 쓰던 글이라 처음에는 제노를 알아보시는 분들에 조금 당황했지만 2년 넘게 써 온 이야기다 보니 제노를 알아보는 분들이 생겨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를 아는 주변의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조금 쑥스럽고 어색하다. 턱없이 부족한 내용과 어설픈 문장력도 내가 느끼는 창피함에 큰 몫을 하지만, 그래도 이 취미 생활에 프로페셔널한 철두철미함을 적용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자기 평가 - 정말 뻔뻔하다)



"배 없어!!!!!!!!!!! 없다고!!!!!!!!!!!!!!!!!"



 그간 우리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덕분에 또 새로이 풀어낼 이야깃거리들이 생겨났다. 제노를 사랑해주시는 많은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무거웠던 이번 제 34화는 여기서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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