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가슴 시리도록 아픈 이별을 경험한다. 힘든 이별 뒤에 뒤따라 오는 것은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가슴앓이.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 위로다. 혹자는 말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때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족이 그렇고 진짜 친구들이 그렇다.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이고 싶다. 이유는 다양하다. 때론 사회적 지위 탓에, 때론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 이유 없을 때도 있다. 이때만큼은 시간을 가둬놓고 실컷 소리 내 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남의 얘기가 아닐 수 있다. 철이 들기도 전인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 시절 갑자기 빚쟁이들이 학교로 찾아왔던 날, 어느 날 전혀 예상 못한 병마가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그때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펑펑 울 수 있게 해달라고.
평범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우러러보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위인,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 한복판 광화문 광장에 동상까지 서 있는, 온 국민이 추앙해마지 않는 두 분 중 한 명,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그랬다.
이순신. 적군조차 두려워하면서 존경했던 장군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합판안치)도 그중 하나였다. 와키자카는 임진왜란 초기 용인전투에서 불과 1600여 명의 군사로 6만이 넘는 조선 근왕군을 대패시킨 일본의 전쟁영웅이다. 이후 와키자카에게 조선 장수는 모두 하찮은 존재였다. 어쩌다 승리를 거뒀다 해도 운이 좋아 이겼겠거니 생각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두려움으로 느꼈던 인물이 등장했다. 견내량해전(한산대첩)과 안골포해전에서 그에게 참패를 안겨준 것도 이순신장군이었다. 패전의 충격에서 6일간 식음을 전폐한 후 그는 깨달은 것이 었었다. 얼마 전 방한한 와키자카의 후손들이 전한 내용은 이랬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다.”
불패전(不敗戰)의 신화를 쓰며 적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함께 받았던 이순신 장군이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인간적 고뇌가 없을 수 없다. 1597년은 장군에게 온갖 불행이 한꺼번에 몰려온 시기다. 일본군의 속임수에 놀아난 선조에게 삼도수군통제사 지위를 박탈당했고, 목숨처럼 아꼈던 조선 수군은 칠전량 해전 단 한 번의 패배로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을 비롯해 수없이 함께 사선을 넘었던 장수 대부분도 이때 차디찬 바다의 고혼이 됐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꿈속에서 원혼이 된 이들을 안타깝게 부르던 장면은 개인적으로 최고의 명장면으로 평가할 만했다.
자나 깨나 걱정하던 어머니가 숨을 거두고 막내아들인 면까지 왜군에게 목숨을 빼앗긴 것도 이때였다. 당시 아들을 잃은 그가 겪었던 아픔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현대의 후순들이 만든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의 한 장면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꿈속에서 막내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안된다 면아"를 처절하게 외치며 달려가는 모습은 인간 이순신 그 자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이들도 있다. 전쟁 중 막중한 임무를 맡은 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이순신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음 놓고 울 곳이 없었다. 백의종군을 하고는 있지만 한때 수군 총사령관이었던 자신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목 놓아 울 수 없던 혼자만의 공간을 내준 이들이 있었다. 전장을 함께 누비던 전우도, 고관대작도 아니었다. 당시 사회 최하층민으로 분류됐던 천민들이었다. "어머니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 종(從) 금수의 집으로 물러났다"(1597년 4월 18일) "저녁에 여산 관노의 집에서 잤다. 한밤에 홀로 앉았으나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1597년 4월 21일).
막내아들 면이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났을 때도 그가 찾은 곳은 내수사의 종 강막지의 집이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면에 대한 비보를 접한 뒤 이순신은 차마 울 수 없었다. 전황이 극도로 안 좋았을 뿐 아니라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지위가 비통함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눌렀던 것 같다. 그가 처음으로 '통곡'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 찢어지는 소식을 들은 사흘 후인 1597년 10월 16일이었다.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 없으므로 영(營)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이순신이 강막지의 집에 기거한 것은 이날만이 아니다. 10월 28일까지 12일이나 이곳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슬픔을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쏟아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강막지는 난중일기에 네 번이나 이름이 등장한다. 천민으로는 드문 일이다. 이순신이 강막지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막내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던 당일 10월 14일이었다. 그가 소를 많이 기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영에서 이중 12마리를 데리고 갔다는 보고를 했으면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경사회에서인 조선 시대에도 소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만큼이나 귀한 존재였다. 그런 소를 12마리나 군사들이 끌고 왔는데도 군말이 없었으니 천민임에도 그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 강막지가 이순신에게 집을 내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재력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스치듯 지나갈 것 같던 우연이 장군에겐 위로의 공간을 내준 소중한 인연이 됐을 것이라 누가 예상했을까.
일반 백성, 특히 천민까지 이순신에게 기꺼이 거처를 내줄 만큼 애정을 보인 것은 단순히 그가 가진 권력 때문은 아니었다. 그동안 장군의 행보를 보면 항상 '백성들 속으로'였다.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 태구련도 수시로 찾아왔고, 장인춘에게는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심부름하던 분노나 사령 등에게는 고생했다는 의미로 술을 나눠주기도 했다. 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투에 나서면 항상 왜구에게 잡혀있던 백성들을 단 한 명이라도 구출해 데리고 왔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했다면 오늘날 후손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어떤 이는 하층민들과 어울렸다며 비난을 쏟아냈을지 모른다. 어떤 이는 장군이 천민의 소 12마리를 끌고 오는 것을 방관했다며 '위선자'라고 했을 수 있다. 이 모든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한 장군이면서 평범한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존재였기에 가능했다. 굳이 고상한 표현을 빌린다면 장군은 시혜를 베푸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아닌 다 같이 함께 하는 '톨레랑스(tolerance, 관용)'에 더 잘 어울린다.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소통'이다. 정치인부터 MZ세대까지 너도나도 할 것 없다. 하지만 진정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혹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외치진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진정한 소통일 아닐 것이다. 내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소통 아닐까. 그래야 내가 힘들과 외로울 때 나를 품에 안고 내 집을 내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보통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은 것은 그가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