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그니 Dec 21. 2023

'요도'를 찾아서

조선 백성의 희망 찾기

세종실록 46권에 기록된 요도애 대한 첫 기록. 세종이 요도를 찾기 위해 봉안시 윤 이안경를 강원도에 보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료=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요도(蓼島)를 찾아라."

1429년(세종 11년) 12월 27일 임금이 명을 내렸다. 함경도와 강원도 백성들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새로운 섬'을 찾으라는 것이다. 명을 받은 이는 종묘제례 등 제사를 주관하는 봉사시 윤(奉常寺 尹) 이안경(李安敬). 세종의 명에 따라 강원도로 갔지만 정작 그곳에서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두 달간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 보니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포청사라는 지역에 사는 김남련이라는 인물이 그 섬에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이안경은 함길도 감사에게 김남련에게 말을 내주고 요도에 다녀오게 하되 만약 그가 병들고 늙었으면 섬은 어떻게 생겼는지, 주민들의 생활은 어떤지, 의복과 언어, 음식은 어떠한지 상세히 물어보라고 단단히 당부했다.

하지만 넉 달이 지날 때까지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보다 못한 세종은 석 달 후인 1430년 4월 3일 함길도 관찰사에게 직접 명을 내렸다. "함길도 경성(鏡城) 무지곶(無地串)이라는 곳과  홍원(洪原) 보청사(補靑社)의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요도가 보일 것이니 수령관 등으로 하여금 김남련을 따라가 그 섬의 지형과 뱃길을 알아보고, 요도에 갔다가 돌아온 자나 해변에 살면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거든 육지와 얼마나 먼지 물어서 보고하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루 뒤에는 상호군(上護軍, 정 3품 상장군) 홍사석을 강원도로 보냈고 이로부터 또 이틀 뒤에는 왕실 제사에 쓸 곡식을 관장하는 전농 윤(典農 尹) 신언손도 함길도로 떠났다. 강원도 감사와 함길도 관찰사와 도절제사에게도 같은 어명이 떨어졌다.


'벼슬 주고 사역 면제' 파격 보상도 무용지물


아무리 사람을 보내도 요도를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파격적인 포상을 내걸었다. 양민은 벼슬을 내리고 공노비는 평생 사역을 면제하고 면포 50 필을, 사노비는 면포 100 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면포 100 필이면 쌀 20 가마니를 살 수 있는 가치. 곡식이 귀해 굻어죽는 일이 흔했던 시절, 이보다 더 좋은 혜택은 없다. 특히 큰 공을 세운 양민은 벼슬을 3단계나 올려주겠다고 떡밥도 던졌다. 강원도나 함길도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탐냈을 일이다.

과연 요도를 찾았을까. 아무도 찾지 못했다. 무려 조정 관료를 네 차례나 보내고 9번 명을 내렸음에도 요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산처럼 생긴 요도를 보았다는 사람을 찾았다고 보고한 관리조차 자신이 직접 찾으니 없었다고 전해왔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를 두고 "요도에 대해 떠도는 말들은 허망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오히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 임금을 기망했다는 꾸짖음이 더해졌다.

요도를 찾으려는 노력은 세종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 30년이 지난 1473년 이번에는 성종이 영안도(함길도의 바뀐 이름, 지금의 함경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렸다. "세상에 전해오길 '무릉도 북쪽에 요도가 있는데 한 사람도 다녀온 사람이 없다'하니 의심스럽다. 경은 다시 바닷가에 사는 늙은 뱃사람을 찾아가 물어 상세히 밝혀서 아뢰라." 하지만 신비의 섬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끝났다. 더 이상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포기했다는 의미다.

요도의 위치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무릉도(지금의 울릉도)를 가다 보면 볼 수 있다 했고, 또 다른 이는 함길도가 아닌 강원도 삼척이나 양양에서 볼 수 있다고 보고를 올렸다. 공통점은 단지 동해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거리도 육지에서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라면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닐 텐데 무릉도 근처까지 가야 시야에 들어온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렇게 중구난방이니 찾지 못할 수밖에 없다.

요도는 찾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섬을 찾기는 했다. 1472년 2월 3일 성종은 당시 세간에 떠돌던 삼봉도라는 섬을 찾기 위해 탐사선단을 꾸렸다.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 4청에 군인 40명과 실력 좋은 무인 17명을 태우고 통신수단은 물론 창과 칼은 물론 화포로도 무장하게 했다. 길잡이는 함경도 부령 출신인 김한경이라는 자로 삼았다. 삼봉도를 알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출발 시기는 4월 그믐. 바람이 잔잔해 지는 시간으로 항해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탐사대가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삼봉도를 찾는 데는 성공했다. 섬의 위치와 모습, 사는 사람들의 수까지 파악했다. 그럼에도 성종은 삼봉도 찾는 일을 돌연 중단했다. 섬까지 가는 길이 너무 험하거니와 가더라도 얻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반역의 섬, 희망의 섬


조선의 왕들은 왜 이렇게 섬들을 찾으려 했을까. 일차적인 목적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영토와 인구다. 그중에서도 영토는 다른 나라와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함 국가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필수 요소다. 땅이 있어야 백성이 있고 그래야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다. 통치자가 모르는 섬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자신이 경영하는 국가의 백성들이 잘 살도록 보살피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세종이 자신이 요도를 찾는 이유에 대해 "토지를 넓히자는 것이 아니고 또 그 백성을 얻어서 부리자는 것도 아니다. 의뢰할 데 없는 무리가 바다 가운데에 모여 살아서 창고와 식량의 준비가 없으니, 한번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굶어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을 누가 구제하겠는가"라고 설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려시대 화산폭발로 갑자기 생겨났다는 제주 비양도의 모습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왕에게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영토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곧 국가 권력의 이반이자 반역과 모반의 씨앗을 잉태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사실이 일반 백성들에게 퍼진다면 그 여파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조선 조정에서 백성들이 섬에 들어가 사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는 요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무릉도나 삼봉도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섬에 대한 조정의 통제는 상상 이상이었다. 삼봉도를 "바닷길이 험해 부역과 조세를 도피한 자가 몰래 들어가서" 사는 곳으로 지목하는 정도는 약과다. 성종은 심지어 삼봉도를 왕래한 백성들을 "나라는 배반했다"며 엄벌에 처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다. 세종 때는 무릉도에 몰래 숨어 들어간 노비 원단 등에게 곤장 100대를 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섬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멀고 파도가 험하면 더욱 그렇다. 조정에서 군선을 동원해 섬으로 가거나 새로운 섬을 찾을 때에도 높은 파도 때문에 애를 먹거나 포기하고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선의 왕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버려두고 알아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믿기 어려운 말을 믿고 험한 바다를 건너 위험을 무릅쓰다가 혹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사정을 살피고 사세를 헤아려서 아뢰라"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반면 백성의 입장에서 섬은 국가의 수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이상향이다. 허균의 소설 '허생전'을 보면 섬은 '지상 낙원'이다. "농사해서 거둔 것을 빼앗기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며, 양반 상놈 구별이 없고, 저 혼자만 편안히 앉아서 남을 부려먹으려 드는 사람도 없다." 소설이 아닌 현실도 마찬가지다. 울릉도나 독도 같은 곳은 거친 파도를 헤치고 사흘 이상을 가야 한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섬을 향해 나아갔다. 독도(우산국) 같은 곳에는 한 때 1000명 이상이 모여 산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섬에서 살면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있고 궁궐 짓기 같은 고된 나랏일에 동원되는 일도 없다. 부역을 피할 수 있고 땀 흘려 일군 논밭의 소출을 빼앗길 염려가 없다면 목숨이 대수겠냐는 절박함의 발로일 것이다.

수 백 년이 흘렀다. 섬은 아직도 국민들에게 희망의 땅일까. 얼마 전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제주도에 터를 잡았다. 소박하나마 자기 집 갖기를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청춘들, 치열한 경쟁에 밀려 취업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던 청년들이 하나 둘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이곳으로 몰려왔다. 이들 덕에 어쩌다 섬을 찾던 육지 사람들도 바다를 건너 떼로 몰려왔다. 하지만 밀려온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자본도 함께 밀려 들어왔다. 제주 동쪽 해변에 이른바 '성지'로 불렸던 카페가 있었다. 주말이면 앉을자리를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얼마 전 그 카페를 다시 찾아갔지만 그 자리에는 다른 대형 카페가 들어섰다. 성지였던 곳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 못하고 한라산 중턱 어딘가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희망의 섬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많던 아메리카들소는 다 어디로 갔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