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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워킹맘 Sep 16. 2019

일흔 넘어 아파트에 처음 사는 엄마가 좋다고 한 이것

“내가 계속 너희들 돈만 받아서 어째야 까. 미안해서”

“엄마, 괜찮아. 이제 그 얘기 그만 해도 돼요. 전세자금 대출이라 이자도 싸, 얼마 안 낸다고”

(주의: 짜증 내는 말투가 아니라 딸이 엄마한테 으레 하는 말투임)

딸들이 보태준 돈으로 아파트에 사는 게 미안하다 말하는 엄마에게 나는 또 잔소리를 한다. 작년 늦가을 71살 김여사 님은 처음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부모님은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줄곧 다가구 주택 또는 빌라에 사셨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도 그곳에 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자려고 누웠을 때 ‘천정 위로 들리는 쥐들의 발자국 소리’ 시각적 장면이 아닌 청각의 기억으로만 남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은 마당이 있어 좋았던 집도 생각난다. 한 지붕 4 가족이 부대끼며 살았던 그곳, 우리 집은 2층이었다. 좁난간에 ‘빨간 대야'를 놓고 물을 채워 여름이면 물놀이를 하던 기억. 작은 방 2개와 다락이 있던 좁은 골목 한 켠의 집도 있었다. 3 자매가 함께 자던 방은 침실이 되었다가 식구들이 모여 밥을 먹으면 부엌이 되었고, 명절날이면 대가족 친척이 모이는 거실로 바뀐다. 중간고사 기간이면 잠든 언니랑 동생이 깰까 이불 뒤집어쓴 공부방도 되었지.


딸들 시집보내고 부모님께서 마지막으로 사신 빌라도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반 계단 살짝 올라간 일층이라 다리가 불편한 엄마가 원하는 높이였다. 뒤쪽 베란다를 통해 연결된 뒤뜰에 고추도 심고 상추도 심어 키우셨다. 손주들이 오면 여름엔 수영장 되었고 가을녁 삼겹살을 구워 먹는 야외 바비큐 장으로 서울에서 호사로운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이 되어 수도가 얼어 세탁기를 못 돌리고, 심한 악취가 가시지 않는 날이 계속되면서 결국 이사를 마음먹게 되었다.




“아파트로 이사 안 왔으면 어쩔 뻔했니. 너희 아빠 실종 신고 몇 번 했을 거야.”

“여기 경비 아저씨들 너무 착해. 한 번은 10층에 내려서 집도 못 찾는 아빠를 집까지 데려다 준거야. 경비 아저씨 중에 107동 할아버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 어쩜 그렇게 사람들이 좋으니”


딸들한테 신세 졌다는 말만 하던 엄마가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기 잘했다는 말씀을 하신다. 아빠 덕분이다. 치매 초기 판정을 받은 아빠는 정신이 가끔 왔다 갔다 하신다. 엄마는 조카들을 돌봐주고 계셔서 아침 일찍 동생집으로 갔다가 아이들이 유치원, 학교에서 올 시간에는 다시 가셔야 한다. 집에서 계속 아빠만 볼 수 없는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우는 사이 몇 번의 해프닝이 있었나 보다.



컨디션이 괜찮으신 날 아빠가 자주 찾는 곳은 집 앞 OO마트이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그곳에서 사 오는 것은 항상 정해져 있단다. “콜라, 김, 진라면” 부엌 다용도실 선반 위에 김과 라면이 식탁 밑엔 콜라가 잔뜩 쌓여 있다. 뜨거운 여름 2.5L짜리 무거운 콜라 2병을 들고도 잘 찾아오시던 아빠는 가끔 아파트 앞까지 왔다가 집을 못 찾으시곤 했나 보다. 그럴 때마다 경비 아저씨가 알아보고 집까지 모셔다 주셨다니 너무나 감사할 일이다. 어른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딸보다 낫네’ 하셨을 듯하다.


신도시 아파트가 즐비한 우리 집에 친정엄마가 오실 때면 “아파트가 이렇게 많은데, 누가 다 여기 산다냐” 하시곤 했다. 그렇게 아파트가 많은데, 이제야 엄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딸들 부담 지웠다고 대 놓고 좋아하지도 못했던 우리 엄마. 아픈 아빠를 보니 이사 잘 왔다 하는 엄마의 말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엄마도 나도 아직까지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나 보다. 경비 아저씨들이 정말 고마울 뿐.


엄마는 '경비아저씨들이 참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내 귀에는 ‘아파트 살아서 참 좋다’라고 들렸다. 남들 다 사는 아파트에 한  평범하게 살아 보는 것은 분명 엄마의 소원이다.


40대에 8남매를 둔 과부로 아파트에서 한번 못 살아보고 돌아가신 외할머니,

71살 아파트에 처음 사는 친정엄마,

34살 노처녀 결혼하며 아파트에 는 나,

0살, 엄마 뱃속부터 아파트에만 사는 우리 딸


이렇게 4대의 걸친 아파트 입성 시기는 점점 당겨졌다.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외할머니와 엄마의 바람 덕분인지 나는 충분히 평범하게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니 조금 더 욕심내서 나는 내 명의의 아파트를 더 사고 있고, 이것은 엄마와 외할머니의 오랜 소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워킹맘의 삶이 지루하다 푸념하고 나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평범한 것이 소원인 사람들을 떠올리면 뜨끔해진다.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음을 이제야 나는 알아가고 있다.  


엄마의 첫 아파트 거실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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