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오뚝 Oct 24. 2021

전공:불문(佛文)에서
전공불문(不問)으로

 전공 불문으로 더 빛나는 전공, 불문

Rien n'est permanent sauf le changement -Héraclite d'Ephèse
변화 말고 영원한 것은 없다- 헤라클레이토스


"융통성을 갖는 것도 좋단다" 


중학교 3학년, 짙은 회색빛 개량한복 차림에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문학작품을 설명해주는 국어 선생님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많았다. 특유의 고상하고 점잖은 분위기도 있으셨기 때문이고, 한 번씩 내주시는 글쓰기 숙제에 정성 들인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터에 선생님의 팬이 된 친구들도 있었다. 그중에 나도 하나였다. 진로상담이었을까,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질문거리가 있어 방과 후에 친구랑 교무실에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정확하게 질문의 내용도 다른 답변의 내용도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흐릿한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는 것이 있다면 '융통성'이라는 한 단어였다. 중학교 3학년 짜리에게 융통성이라는 말을 왜 해주셨는가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많았다. 어쩌면 한번 정해지면 그대로 끌고 나가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성격을 선생님은 알아보셨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프랑스어와 함께 해오면서 어쩌면 그 고지식함이 전공에 대한 끈질긴 고집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어느 부분에서 '융통성'을 발휘해야 했던 것일까?


프랑스어는 내게는 그저 단순한 외국어 그 이상이었다.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마침내 우물 밖에서 나와 다양한 사고방식도 접하고 그러면서 나의 세계도 점점 더 다양한 생각으로 색깔들로 물들어갔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내 전공을 더 살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나 애착이 가는 언어였기에, 처음에는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일을 하는 것이 그저 당연하다는 생각이었고 어떻게든 오래도록 이 언어와 함께 하고 싶었다. 프랑스어를 전공했으니 프랑스어에 관한 일을 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면서 시간이 흘러갈수록 어쩌면 그 생각이 나를 더 옭아맸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현듯 그 옛날 중학교 3학년 때의 선생님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회인 중 10명 중 3명만이 전공과 직업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10명 중 7명은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애초에 전공을 잘못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직업에 있어서 전공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방점을 찍고 싶다. 물론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거나, 본인이 흥미가 있고, 좋아하는 것 혹은 더 발전시키고 싶은 영역에서 보다 전문화된 지식을 쌓기 위해 어느 한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좋지만, 대학공부 4년, 그리고 대학원 공부 2년에 의지해서 앞으로를 살아가기에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는 게 내가 일을 하면서 체감한 현실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날 때 더 많은 기회와 더 다양한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역시도. 


통역사로 일 하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프랑스어를 잘하면 물론 프랑스와 관련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영어를 더하면 훨씬 더 많은 문이 열린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전문 분야 이를테면 금융, IT,  건축, 경영, 예술, 공학 등 다른 분야가 함께 접목되었을 때 기회는 더 많아진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나는 얼마간은 이 영역의 확장에 있어서도 나 스스로 한계를 그어놨던 적이 많았던 터라 -예를 들어 이제 와서 다른 분야를 어떻게 공부할까, 이제 와서 내가 다른 분야를 어떻게 따라갈까 하는 것들- 이렇게 경계를 허무는 일이 나에게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실제로 '전공 불문으로 살아남는 법'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도 인터뷰했던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프랑스어라 공통분모를 가지고 저마다의 목소리로 변주해 나가는 모습이 각자의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나의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해 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공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분야를 받아들이는 전공불문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주효해 보였다. 


전공, 불문에서 전공불문이 되기까지


내가 생각하는 대표적인 전공불문의 대명사는 김미경 강사님이다. 원래는 작곡과였는데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인플루언서이자 강사로 자리매김을 했으니, 사람들을 위한 콘텐츠를 '창작'해낸다는 점에서 곡을 만들어내는 '창작'과 어느 정도는 관련성이 있겠으나 그 이후로는 전형적인 전공불문러 (전공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라고 할 수 있겠다. 가깝게는 주변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친구가 영어 선생님이 되거나,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영어로 피아노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 또 주변에서 영어통역사였다가 회계사로 전환해서 일하고 있다는 사람,  회사 앞 헬스센터에는 변호사였다가 헬스장을 오픈했다는 사람, 이 밖에도 수많은 전공불문러들이 있다. 


전공을 벗어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더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는, 처음 가진 시작점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에서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영역을 확장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원래의 영역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나의 경우는 프랑스어를 전공해오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프랑스어에 관련된 일만을 해오다 보니 오히려 쉽게 바뀌지 않던 생각들이, 일을 해오면서 만나고 부딪힌 현실과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변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렇게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전공불문러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공의 경계를 넘어서서 나의 영역을 확장해 갔을 때,  기회도 더 많이 생기기도 하시만 동시에  나의 전공도 더 돋보 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앞으로는 전공불문의 길을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 길에 끝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면서, 예전에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면, 이제는 야생마처럼 이곳저곳 들러가면서 내가 머무르고 싶은곳들, 내가 배우고 확장하고 싶은 곳들을 탐색하면서, 여정 하나하나를 충분히 경험하고 곱씹어가면서 여유롭게 그렇게 유유히 걸어가고 싶다. 물론 프랑스어와 함께.  


에릭요한슨 "Go your own road" 출처 :https://www.onceuponapicture.co.uk/portfolio_page/go-your-own-road/











이전 26화 나의 오래된 친구, 파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