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스러운 겸손함
나는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침묵을 두려워 했었다.
이제는 살면서, 침묵의 평온함을 느끼고,
조용한 사람들이 소음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가를 알게 되었다.
조용이 몸을 울리듯한 자기자신의 소리는 가끔 명상이 되고 울림이 될 수 있으나,
타인의 이야기는 위협으로 들리는 세상이기도하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엮으면서 내가 왜 겸손과 고요함의 미학을 살떨리듯 외치고 다짐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그림을 그리며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는 작가와 같은 마음..
류민자 교수님의 여성스러운 그림들에서 사랑스러운 아내의 모습도 다정한 엄마의 모습도 보인다.
일을 하면서 이곳과 사람들과 작품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매우 행복하다.
마음이 피곤하지만 않으면 내 몸쯤이야 언젠가는 따라와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 몸의 고요와 평화와 겸손한 신체도 빌어본다.
류민자 교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한 점의 색이 아니라 한 생명이 숨 쉬는 듯하다.
그의 화면에는 늘 바람이 지나가고, 빛이 흔들린다.
가느다란 붓끝은 생명과 질서, 그리고 조화의 언어를 알고 있는 듯, 조용히 리듬을 만든다.
류민자는 늘 자연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은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자연이 우리 안에 남긴 기억의 형태였다.
바람이 흘러간 자리, 물결이 닿은 흔적,
그 모든 움직임이 색면으로, 선으로, 그리고 여백으로 번져 있었다.
그녀는 말하곤 했다. “그림은 생명을 닮아야 해요.”
그 말처럼, 그녀의 색은 숨을 쉰다.
캔버스 위의 색들은 살아 있는 세포처럼 진동하며,
어느새 한 송이의 꽃이 되고, 한 사람의 마음이 된다.
1980년대, 아치울의 언덕 아래서 그녀는
하인두, 김점선, 구본창, 천상병, 박완서와 같은 예술가들과
삶을 나누며 예술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예술은 화려함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인두가 빛으로 기도했다면,
류민자는 색으로 노래했다.
그녀의 화면은 부드럽지만 단단했고,
여성의 감각으로 세상의 균열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대표작 〈피안〉에서는
넓은 색면 사이로 미묘한 진동이 느껴진다.
그것은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 사이의 간격 —
즉 ‘피안(彼岸)’을 향한 마음의 움직임이다.
류민자의 그림은 결코 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그 안에서 시간의 층과 마음의 결이 드러난다.
그녀의 색은 화려하지 않지만, 빛의 내면을 품고 있다.
가정과 예술, 모성과 창작 사이에서
그녀는 한 점의 흔들림 없이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 길 끝에서, 그녀의 그림은 이제 한 세대의 기억이 되었다.
그녀의 화폭은 말한다.
“생명은 늘 이어지고, 예술은 그 생명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