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 대화가 닿길
몸과 마음, 대화가 닿길
인간이 불행하기 시작한 것은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지 않고, 마음이 몸을 벗어나 있을 때다. 마음이 꿈꾸는 이상과 다르게 직접 살아내야 하는 몸은 현실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반응해야만 한다. 단순한 반응이면 그도 괜찮겠지만 갈등이 이어지는 관계라면 감정은 더욱 소용돌이치면서 행복은 꿈꾸는 이상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려 최소한 현실에 안주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럼 어떻게 그 마음을 현실에 잡아 묶을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 마음 다스리기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마음만 다스려서 해소될까? 몸도 다스려 마음에 가까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마음으로 가는 길은 다양한 취미로 스스로가 물리적인 활동으로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것이다. 반복적인 물리적인 활동으로 마음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다
일상의 여유를 향유하는 가치
‘만족’은 ‘일상의 여유’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일상 속에서 여유를 향유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만족’은 가만히 있으며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여유는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유하는 것이다. 자유는 꼭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얽매이는 현실은 누구에게나 감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의무’와 ‘책임’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감정적인 면에선 부자유함인 것이다. 사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만족하는 일상의 여유는 최소한 경제적으로부터 자유가 먼저인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자유한다 해서 다 일상의 여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여유는 시간과 돈의 틈새를 찾아 삶에서 필요가 아닌 욕망을 다스려 자신을 위해 사용하게 될 때 진정한 향유가 된다. 억지 주장 같지만, 그 틈새에 취미 활동이 있다.
‘몸과 마음’은 ‘동과 정’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다.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수 십 년간의 교육을 통해 보편화되어 ‘나만’ 옳다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 사회에서 ‘옳다’와 ‘틀리다’에서 ‘다르다 ‘를 인정하며,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요구하며 변화하고 있다. ‘몸과 마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건강’이다.
사실 건강적인 측면에서 몸과 마음은 하나이다. 동양적 사고는 사람을 소우주라 했다. 대우주 자연과 함께 사람의 삶을 우주의 이치로 해석했다. 나는 취미는 사람 간의 활동으로 마음과 몸을 일치하게 하는 한 가지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꼭 동적인 활동만이 몸을 대변하고, 정적인 활동만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적인 활동을 통해 마음을 들여다 보고, 정적인 활동을 통해 몸의 쓰임을 돌아볼 수 있다. 그림으로 표현된 불꽃을 보면 가장 깊은 속은 파랗고 하얗다. 불이 물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으로 불과 물은 불가분의 관계로 몸과 마음도 이 이치인 것이다.
해서 가급적 자신의 성향에 반대되는 한 가지를 정해서 실천하기 시작한다면 자신으로부터 저항의 불꽃을 스스로 만들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것들은 이미 하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