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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Dec 22. 2021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

오랜만에 남편과 둘이서만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가 오가던 중 불쑥 연애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로 벌써 10여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을 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서로 늙었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하면서 연애시절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사실 외모적으로 우수한 실적(?)을 갖고 있는 남편은 본인이 학창 시절에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를 우스갯소리로 내뱉곤 하는데, 그런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던 나로서는 '근데 왜 나랑 결혼했냐'는 최후의 승자(?)와 같은 발언으로 응수하게 된다.


"예쁘다기보다는... 뭐랄까 웃는 모습이 진짜 같아서 좋았어. 요즘은 너무 안 웃지만."


그의 말처럼 나는 예쁘다는 말을 듣진 못했지만 '웃는 게 예쁘다'는 말은 이따금 들었다. 백여 명 정도가 함께 수업을 듣던 비좁은 강의실에서 미소가 참 예쁜 여학생이 있네요 하시며 나를 지목하시던 연로한 선생님의 말씀은 아마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기억은 아닐 것이다. '몽실이' '닥종이 인형' '꿈돌이' 같은 별명 역시 객관적 기준에서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나름 친근한 인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를 가졌다는 이유로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특히 콧대가 낮은 작은 '코'는 참으로 거슬리는 것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것만 눈에 띄었고, 가족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난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콧대가 낮은 것인가를 반문했다. 특히 나름 외모를 가꾸던 대학생 때 그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고 급기야 성형을 할까 말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적극적으로 알아보려는 큰 시도는 하지 않은 채, 거울만 보면서 고민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나에게 당시 같이 살던 동기 언니가 일침을 날렸다.


"유진아, 코만 문제라고 생각해?"


늘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휘둘리던 나와 달리 냉철한 이성을 가진 언니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아주 간단하게 끄집어 올려주었다. 지금 내 얼굴은 나름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인데 수술을 통해 콧대만 높아진다고 과연 내가 상상하는 '미인'의 얼굴이 만들어지겠냐는 말이었다. 언니의 말은 정확했다. 코만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니는 그보다 나의 장점을 살리는 화장기법이나 스타일링에 변화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말로 조언을 주었다. 그 이후로 세월은 흘렀고 성형에 대한 고민은 이따금 생겨나긴 했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자 수술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은 채 살아오고 있다.


이제는 낮은 코보다 눈에 띄게 늘어가는 기미들과 주름들이 눈에 거슬리는 시기가 되었지만 더 이상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예쁘다 안 예쁘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참 쓸데없는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 나의 고민은 남편이 지적한 것처럼 내가 '잘 웃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옮겨졌다. 예전의 나는 참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학교에서는 아이들 앞에서 진지한 척을 하느라,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 앞에서 근엄한 척을 하느라 웃지 않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느 날은 우리 반 아이가 내 유튜브 영상에 학교에서의 모습과 다르다는 댓글을 남겼다. 그 댓글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났는데 아마 영상 속의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었다.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마음과는 달리 어색해서 잘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 앞에서 웃음을 보이면 나의 근엄함이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보다는 차별하지 않기 위해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자는 신념이 굳어져 이제는 표현하는 것이 조금 어색해진 상태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늘 사랑을 많이 표현하라고 하지만 정작 내가 점점 어색해지고 있으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게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조차도 내가 너무 웃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아이들 조차 '엄마는 왜 이렇게 안 웃어?'라는 말을 할 정도이니 문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표현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실천이 잘 안 되는 나를 보면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간격이 넓으면 아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름다운 나의 미소를 아껴서 정작 어디에 쓰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웃음에 옹졸해진 걸까? '진지함'이라는 키워드는 정작 나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진지함'을 혼자서 고수하고 있는 걸까? 이러다 나중에 뒷방 늙은이가 되어 혼자서 꽁꽁거리며 신문이나 들여다보고 있게 되는 건 아닐는지. 상상만으로도 짠스러움이 몰려온다. 어쩌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들까지 다 내가 처리하려고 하면서, 다 잘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잘해야만 한다고 하는 압박에 시달리면서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한정된 나의 가방에 더 많은 것을 담으려고 욱여넣으면서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중이 제 머리는 못 깎고, 남의 수는 잘 보여도 내 수는 안 보이듯 나 역시 그런 덫에 빠져있는 게 아닌지 나의 줄어든 웃음을 통해 돌아보게 된다.


아이들에게 다 써오라고 닦달했던 <내가 행복함을 느낄 때>를 내가 다시 써봐야겠다. 아이들 앞에서 말하다가 웃는 것이 나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안 웃는다고 애들이 내 말을 더 잘 듣는 게 아니니. 객관적 기준에 미인은 아니지만 웃는 것이 예뻐서 좋았다던 남편의 말처럼 진심을 다해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니 만큼 스스로가 그 웃음을 옭아 메지 않도록 나를 좀 내려놓고 싶다. 발전이 없어 보이지만 성장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나 자신이 우상향 하는 우량주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즐거움을 보다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좀 더 웃는 사람이 되자.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처럼 나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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