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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pr 19. 2022

'킹받네'라는 말, 이제 일상 대화도 통역이 필요하다

 요즘 아이들은 ‘킹받다’라는 표현을 참 많이 쓴다. ‘킹받다’는 ‘열 받다’에 ‘킹(King)’을 붙여 만든 합성어로 매우 화가 난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 진행했던 중고등 학생 수업에서도 아이들은 조별 이름으로 ‘킹받쓰’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2021년 12월 4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로 쓰던 신조어 ‘킹 받네’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건 유튜브 ‘피식 대학’의 멤버 김민수가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유 퀴즈)’에 출연하면서다. 네이버 데이터랩을 통해 분석해 보면 2019년 초부터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한 ‘킹받네’ 검색 량은 2021년 1월 tvN ‘유퀴즈’ 방송 이후부터 3~4배 급증했다.


 이 기사에서 ‘킹받다’는 ‘분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유행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말을 사용하는 아이들은 “귀여워서 킹받는다” ”너무 잘해서 킹받는다”처럼 긍정적인 맥락에서 많이 쓰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킹받다”를 말하며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 해맑다.


 대한민국 아이들, 특히 십 대들은 왜 이 ‘킹받다’라는 말에 푹 빠졌을까? 시대가 바뀔수록, 새로운 문물이 늘어날수록 신조어가 느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비속어, 욕보다는 이런 신조어가 늘어나는 것이 더 기꺼운 일이지만, 문제는 기성세대와의 언어 단절이다.


 회사에서 젊은 해외 바이어와 자주 일을 하는 남편은 종종 영어로 이야기하기가 어렵다고 툴툴거린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영어 대화는 괜찮은데, 사적인 대화에서 젊은 외국인 친구들의 대화를 도통 따라가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Hello, What't up"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그 문화에 젖어들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어 신조어들을 쓰는 탓이다. 우리 아이들이 점점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젊은 외국인 친구들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아서 시대와 문화, 사람들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이런 신조어들이 꽤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치미’이다. 시치미는 매를 이용한 사냥을 즐겨했던 고려 사람들이 자신의 매임을 표시하기 위해 단 이름표이다. 당시에 하도 매의 이름표를 떼고서 자기 것인 양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인지 ‘시치미를 떼다’가 ‘자기가 하고도 안 한 체하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다.’는 표현으로 전해오고 있다.


 솔직히 왜 대한민국 젊은 세대들이 이렇게까지 ‘킹받다’라는 표현을 열광하는지 잘 모르겠다. 직접 심도 있는 인터뷰를 나눠 적이 없지만, 그들 역시 큰 의미 없이 이 표현을 입 밖으로 내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단지 유행 때문에 이 말을 좋아하는 걸까? 굳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저 유행 때문에 하는 말이라면 이렇게까지 말의 수명이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킹받네’의 경우, 당당하게 네이버 국어사전에 등재 공식적인 신조어이다.

 

 아마도 친구들은 이런 2가지 이유 때문에 ‘킹받다’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첫째, ‘킹받다’라는 말은 기존의 ‘열 받다’라는 말보다 소리가 훨씬 경쾌하다. 거친 자음 ‘ㅋ(키읔)’이 들어가지만, 모든 자음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는 ‘ o(이응)’이 있어 훨씬 듣기가 좋다. ‘킹’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을 하다 보면 어느새 인간관계에서, 사회에서 축적되었던 분노가 조금씩 풀리는 듯하다.


 둘째, ‘킹’(King)이라는 의미가 나중에는 ‘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준다. ‘킹’을 계속 말하다 보면 비록 지금은 가진 것이 없고 보잘것이 없지만 ‘앞으로 왕처럼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마음속에 새겨지는 듯하다. ‘킹받다’라는 말을 큰 소리로 외치면 앞으로의 탄탄대로가 조금씩 신기루처럼 펼쳐진다. 마치 주문처럼 말이다.


 이렇게 젊은 문화가 점점 늘어가는 것은 기꺼운 일이지만,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와의 언어 단절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외국어 통역기뿐만 아니라 세대끼리의 통역기도 너무 시급하다. 사실, 세대 간의 언어 단절은 대화와 소통으로 쉽게 풀릴 수 있다. 서로가 열린 마음으로 각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마음을 먹기까지가 너무 힘이 든다. 젊은 세대는 계속 과거의 일을 들먹이면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만 반복하는 어른들을 향해 말문을 닫았고, 기성세대는 툭하면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내세우는 젊은 세대를 향해 귀를 닫았다. 그래서 세대 간에도 언어 통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언어만 통역이 된다고 각 세대의 대화와 관점이 모두 이해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오해들이 쌓이다 보면 기성세대든, 젊은 세대든 계속 글자 그대로의 ‘킹받는’ 일이 자꾸만 생길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 소통을 하고 그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며 말하는 것은 참 중요하다. 그래서 통역은 참 어렵다. 남녀 간의 통역이 어렵고 연인 간의 통역이 어렵고, 고부간의 통역도 너무 어렵다. 그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 바로 세대 간의 통역이다. 아직 언어 단절로 가지 않은 이때, 서로가 서로의 언어의 문을 닫지 않은 이때, 마음을 열어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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