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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ug 11. 2022

폭우 속에서 만난 이웃 주민들의 정

 우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게시판에 정문 주변의 도로 주차를 한시적으로 허용한다는 공지가 붙었다. 원칙대로라면,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주차할 때 무조건 벌금 부과했다. 하지만 며칠 전 기록적인 폭우로 인한 지하 주차장 침수로 관리 사무실에서 시청에 양해를 구한 모양이다. 현재 지하 주차장은 주차 공간이 텅텅 비어 있지만, 대부분 주민이 그날 밤에 겪었던 일들이 고통스러웠던 탓인지 지하 주차장보다는 안전한 지상을 선택해 주차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밤이 되면 수많은 색색의 차들이 아파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삶의 공간에서 겪은 뜻밖의 천재였다. 현재는 폭우 소식이 들릴 때마다 자꾸만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 일은 사흘 전에 발생했다. 모두가 지친 하루 일을 정리하고 잠들 자정 무렵이었다. 벼락과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밤이 되면서 더 심해졌고, 창문을 더 꽁꽁 잠그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와 함께 아파트 안내 방송이 웅얼거리며 흘러나왔다. 몇 초도 안 되던 짧은 시간, 남편이 아무래도 바깥 상황이 이상하다며 우산을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몇 년 전에도 이런 날씨에 지하 주차장이 침수되는 일을 겪은 터라 계속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창문도 열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이미 바깥은 수많은 노란색 헤드라이트들의 대탈주 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방송이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난데없이 들린 방송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사람들과 느릿느릿 줄이어 물이 잠긴 지하 주차장을 탈출하는 차들, 우산을 쓰고 그 광경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점점 까맣게 차오르는 지하 주차장 물들, 노란 차량의 헤드라이트들과 아파트 주차장의 불빛들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마치 지구의 마지막 날을 보는 듯한 아찔한 풍경이었다.


 30분 넘게 절망적인 마음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사이, 무사히 차를 옮긴 남편이 온통 다 젖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발견한 공간에 이중주차를 한 터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차를 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좀 착한 것 같아.” 이미 차를 옮기거나 그 광경을 본 많은 사람이 관리 사무실에 전화해서 방송하라고 독촉 중이라고 말했다. 침수된 지하 주차장에 아직 차들이 반 정도 남아 있는 탓이었다. 남편도 ‘오랜만에 착한 일을 해봐야겠다’라며 관리 사무실에 전화했지만 연신 통화 중이라는 알림만 울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지하 주차장 침수로 차갑게 마무리될 뻔한 하루였지만,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이웃사촌의 정을 확인하며 조금은 따뜻하게 잠들 수 있었다.


 요즘은 여기저기 폭우로 인한 사건 사고로 뉴스 지면을 계속 장식한다.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집으로 밀려드는 물길을 피하지 못해 목숨을 잃은 가족들, 길을 가다 맨홀로 빨려 들어간 사람들, 침수된 차를 버리고 탈출한 운전자들, 온갖 이야기와 사연들이 난무한다.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없고,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없다. 이런 천재지변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가장 안타까운 점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좋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항상 이런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다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예전에 이렇게 해야 했다는 이야기만 반복한다. 반지하 건축을 금지하고, 강남의 배수구를 더욱더 넓게 확장하고, 양수기를 더 갖춰야 한다는 의견들은 이미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서는 부질없는 이야기다.


 브래디 미카코의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책에는 엠퍼시(공감)를 설명하며 사람들의 의도적인 망각에 대해 언급한다. 모두가 직접적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지구 온난화에 어느 정도 원인 제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 하나 어떻게 한들 변할 수 없다’ 혹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라는 생각 속에 그냥 일상 속의 망각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이런 천재지변과 재난이 발생하면 무의식적인 엠퍼시(공감)로 하나 되어 도움의 손길과 집단적인 움직임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 역시 평소에는 그렇게 끈끈하게 인사하며 생활하는 편은 아니었다. 층간 소음에, 담배 연기로 인한 불만으로 며칠에 한 번은 아파트 방송이 나왔고, 안내문이 붙었다. 윗집이 쿵쿵거리며 ‘에휴’하며 참았고, 나 역시도 아이들이 뛰지 않도록 단속을 시켰다. 괜히 시비 붙을 이유를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 그냥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지하 주차장 침수로, 서로를 생각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이웃사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기록적인 폭우와 혹한과 같은 이상기후가 지구 온난화의 결과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원인도 알고 이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줄도 알지만, 지금까지 했던 일상들을 마냥 포기하기는 너무 어렵다. 이미 시원한 에어컨이 주는 달콤함을 느껴버렸고, 차를 이용해서 가는 편안함을 알아버렸다. 현재 사람들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지 않은 채 지구를 살리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우리 앞의 이 위기는 엄청나게 뛰어난 영웅만이 해결할 수 있을까? 지난밤, 저마다 자신의 전화기들을 붙들고 지하 주차장에 갇힌 다른 차량을 생각했던 이웃 주민들을 생각하며 나 역시도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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