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유라 Oct 02. 2024

슬로우보우트 투 차이나-2. 베이징 그리고 츠펑(1)

베이징 국가박물관에서

 2. 베이징 그리고 츠펑     

   - 베이징에서

   2010년 대 초반 즈음이었다. 춘절 다음 날 아침, 베이징, 천안문 광장 주위에 있는 중국역사박물관 입구에 추운 날씨에 손을 호호 불며 서있었다. 춘절 기간이었지만 아침부터 입구는 어디선가 몰려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재개장하다 보니 더욱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 것 같았다. 재개장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중국은 영토가 넓어서 많은 고대 유물들은 출토지와 가까운 각 지역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베이징을 찾는 자국민과 외국인 수가 늘자, 모두를 위해 수도 베이징에서 중국 전역의 유물을 볼 수 있도록 유물들을 모아 재개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날은 내가 중국에서 처음 박물관에 관람을 간 날이었다.      

  입장해서 보니 고대부터 명청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의 문화재들이 두루 있었다. 특히 고대 유물관엔 쓰촨의 산씽투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전대 미문의 마스크라든가, 쓰촨의 다른 지역에서 나온 부조로 조각된 그림판, 운남과 귀주 지역에서 나온 개성적인 청동기들, 황하와 장강 사이 중원에서 나온 정과 동물 형상 청동기들, 산동에서 나온 토용土俑들, 옛 서하국 땅에서 나온 티베트 불교풍의 도자기, 실크로드 지역에서 나온 당삼채, 몽골지역에서 나온 요삼채 등,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 서로 개성이 다른 유물들은 끝이 없었다. 또 서안에 가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서안, 병마용갱에서 갖고 온 실제 병마용과 마차도 있었다. 외국인인 나에겐 과거에 사진으로 본 당삼채와 병마용을 제외하면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고대 유물들은 화강암지대나 현무암, 사암지대처럼 이질적인 지층이 지각 대변동으로 서로 뒤섞여서 마침내 지상에 드러난 것처럼 대륙의 과거를 내 눈앞에 보여주었다. 반면 송나라 이후 중세, 근대 유물관에 전시된 것들에 대해선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송명 시기와 청의 유물들은 주로 도자기나 불상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전에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았다.


  고대관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들 중 하나는 전시관 구석에 있던 산동山東 토용土俑이었다. 토용은 크기 40에서 50센티미터 정도로 병마용갱의 토용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나름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고대 중원의 동쪽인 산동 토용과 중원의 서쪽인 山西 병마용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춘추시대 산동의 귀족 집안은 토용 수십 기(아마도 실제 매장지엔 수 천 기의 토용을 묻었을 지도 모르겠다)를 부장품으로 묻었는데, 수백 년 후 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의 통일 왕조를 연 진시황은 병마용갱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을 만들었다. 진秦은 협서성陕西省 서안西安의 서남쪽, 내륙 깊숙한 지역에 있었다. 그곳은 서융이라는 오랑캐가 살던 고립된 산악지역이었으나 티베트 고원이나 몽고 고원만큼 이질적인 자연환경은 아니었다. 진시황이 무덤 안에 그렇게 엄청난 부장품을 묻은 것은 그의 독자적인 생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고대국가의 수도가 있던 은허나 산동에 있었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진시황 토용이 형상화한 당시의 사람들은 어디서 왔던 사람들이었을까. 


산동 토용


  반면 자연환경이 완전히 달라지는 몽고는 중원과는 다른 문화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고 두 지역을 바라보게 된다. 역사를 엉뚱한 방향으로 접근하는 나의 지인은 진시황의 병마용갱을 떠올리면서 몽골 초원에서 위대한 왕, 징기스칸의 무덤을 찾겠다고 했다. 보물찾기를 해보겠다는 세속적인 욕심이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이런 노력에 대하여 회의적인 의견을 표현해왔다. 징기스칸은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채 초원 전장을 누비다가 죽었다. 값이 나가는 귀금속이나 토용을 만들어 땅 아래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풍습은 중원의 것이지 몽골의 것이 아니었다. 학자들이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징기스칸의 무덤에 부장품은 없으리라 추측하는 이유이다. 

  하여튼 그날 많은 진귀한 유물 중에서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단연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鼎과 준尊(동물 모양 술통)이었다. 제작 연대는 하상주夏商周 상고 시대였는데 상고시대 중 상나라(기원전 16-11세기, 은나라를 일컬음)와 주나라(기원전 11세기-8세기로 서주시기로도 알려짐)시기가 청동기의 절정기였다. 출토 지역은 갑골문이 많이 출토되는 은허 유적지나 중원지역이 많고 사천도 있다. 

  정은 고대의 솥이나 향로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손잡이, 즉 귀가 달려 있고 아래엔 세 개나 네 개의 발이 있다. 또 겉엔 인간과 자연을 형상화한 세련된 디자인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작은 것들도 있었지만 대개 무게만 수백 킬로에 달하고 호화스러워서, 백성들의 일상엔 적당하지 않고 국가 행사나 제천행사에 쓰였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 생각 없이 청동 학과 코뿔소 모양의 준尊을 보다 보니 어렸을 때 들었다가 잊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속속 기억의 깊은 곳에서 떠올랐다. 

청동 준尊


  그 시대는 신화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전설의 시대였다. 하나라와 상나라에선 요괴가 판을 쳤다. 주나라 궁정엔 하늘에서 내려온 용의 침이 몸에 침범을 해와서 잉태를 하게 된 궁녀가 있었다. 그 궁녀가 나은 여자 아기는 불길하여 죽여야 한다는 신탁을 듣고 버려졌으나, 주나라 선왕에게 원한이 있는 이가 우연히 그 여아를 거두어 키우게 된다. 그리고 훗날 그 여자 아이는 ‘포사’라는 이름을 얻어 자라고 주선왕의 아들, 주유왕은 포사에게 빠져 국력을 탕진하다가 나라에 처들어온 이민족에게 잡혀 죽고 결국 서주(西周)는 망한다. 정은 이런 신화와 전설의 시대를 지탱하던 상징적 존재였다. 

  정鼎이 한 나라의 정통성 혹은 왕권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우공구주禹貢九州’ 이야기로 잘 알 수 있다()나라의 시조 우왕禹王이 순임금의 명을 받들어 황하의 치수治水에 성공한 후 천하를 아홉 개의 주로 나누어서 각 주의 특산물을 진상품으로 거둬들여 성덕을 펼쳤다이에 감읍한 구주의 수장들은 각 주의 진귀한 금속을 모아 우왕에게 바쳤고우왕은 이를 재료로 삼아 9개의 정을 제작해 대대로 왕위 전승의 징표로 삼게 했다고 한다구정은 하나라를 거쳐 상나라로다시 주나라로 전승되었다당시 아홉 개의 정 중 하나를 소유한다는 것은 바로 천하를 다스릴 만한 덕과 정통성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그런데 천하에서 권력의 징표인 정이 사라졌다고 했다.      

  “주나라 덕이 쇠하고 송宋의 사직이 망하면서 정鼎은 윤몰淪沒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시대의 권력이 사라지고 다른 시대가 왔다는 소리였다. 그 시대는 춘추시대였다. 신화와 정치가 한데 어울려 구분이 안 되는 시기는 사라져갔다.동주열국지에 의하면 서주(西周)가 망하고 잠시 혼란기를 거쳐 다시 주 왕실은 수도를 함양에서 동쪽의 낙양으로 천도하여 다시 주 왕실을 열었다. 주 왕실의 천도를 도운 사람이 진 목공인데 그는 훗날 천하를 제패하는 진시황의 선조이다. 목공은 주 왕실을 도와 진나라의 정통성을 다지고 주 왕실로부터 봉토를 받아 국력을 키운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이전의 상고시대의 주나라와 구분하여 동주라고 했으며, 춘추시대의 서막은 동주시대부터 시작된다. 과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동주와 우후죽순처럼 중원에서 일어난 신흥 패권국들의 각축전이 절어진 시기가 춘추시대였고 역사가 본격적으로 기록된 시기였다. 춘추전국 시대가 갖는 의의는 대륙 각 곳에 수백 개의 나라로 흩어져 있던 부족민들이 자신의 지역을 넘어 대립과 전쟁을 하면서 섞이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하나의 중국이라는 틀을 처음 만들어갔다는 데에 있다.

  그나저나 사마천이 사라졌다고 지적한 그 정들은 모두 사라진 것일까? 혹시 박물관에 있던  정들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춘추전국시대 수백 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진시황은 우왕禹王 이후 전해져오다가 사라진 그 정들을 찾겠다고 팽성彭城(지금의 서주徐州)을 지나 사수泗水에 가서 호수를 뒤졌다는 말을 전한다. 

   진시황은 사라진 정만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당시에 명검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오나라, 합려의 검을 찾아 합려의 무덤인 쑤저우의 호구도 들렸다. 호구엔 합려의 아들, 부차가 부친의 무덤을 만들 때 명검 3,000 자루를 함께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합려가 죽고 270년이 지난 시점에서 진시황은 명검을 얻고자 합려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고, 놀란 진시황이 검으로 내리쳤으나 빗나가 돌만 깨졌다고 한다. 무덤 발굴은 중단됐고, 깨진 자리에 물이 고여서 ‘검지’라는 연못이 됐다. 진시황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특출나고 신기하다.

  정은 중국의 문화재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해왔다. 그림과 글씨, 골동품에 탐닉했던 송나라의 휘종은 상 왕조의 수도가 있는 안양(은허 유적지)으로 사람을 보내 정을 찾았다. 고대의 청동기를 소장하고싶어했던 사람이 어디 휘종 한명이랴. 중국 역사 속에서 정은 언제나 중원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귀물貴物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제기祭器들을 꺼내봤다. 제기에 음식을 놓는 것이 귀찮아서 차례에도 제기를 쓰지 않은 햇수가 벌써 꽤 되었다. 근데 먼지를 뒤집어쓴 그릇들을 헤집어봐도 그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골동품은커녕 민속품 수준에도 못 낄 물건이었지만 집안 어른들이 한동안 잘 썼던 그 향로는 보이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