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Jan 21. 2024

3차원과 4차원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일곱 번째-(부제: 공간과 시간 사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시간의 실제 측정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 기준이 있다면 말이다. 시(時)라는 단위가 거짓임을 나는 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시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시간에 관한 상념'[시간에 갇히다]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이 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페소아의 이 문장이 또 나에게 상념을 던져준다.


우리 모두에겐 똑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는가. 이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시공간이 중력에 의해 변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이것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이는 드물다. 이건 아주 거시적인 관점, 우주적 관점에서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똑같은 24(h)/7(d)의 같은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써야 할지만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측정하고 정의하고 인지하는 시간은 진짜일까?    




과거 나는 제조업 기업에서 오랜 시간 근무를 했다. 제품 원가를 다루는 부서에서 오랜 시간 근무를 하다 보니 이 시간에 대해 너무도 예민해져 버렸다. 제조업 경쟁력의 관건은 비용 절감이다. 최초의 제품이 아니라면 최고의 제품이 되어야 한다. 최고의 제품은 같은 품질이라면 가장 낮은 가격을 가진 것일 수밖에 없다. 가장 낮은 가격은 가장 낮은 비용을 전제한다.


비용은 원가이고 이 원가를 어떻게 낮추느냐가 제조 기업의 사활이 걸려 있다. 그리고 이 원가 경쟁력은 시간(Cycle time: 제품 개당 소요 시간)과 임율(Wage rate/Hr)의 싸움이다. 어차피 시장가에서 크게 움직일 수 없는 재료비(원자재, 부자재)를 줄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임율 또한 국가(최저시급)와 시장(수요와 공급)에 의해 어느 정도의 제재를 받게 된다.


기업들이 최저시급에 왜 그렇게 민감한지는 이 제품 원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최저시급은 중소기업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대기업 정직원이 최저시급을 받을 리 만무하다. 문제는 중소기업에서 비용(인건비) 증가는 대기업의 납품 단가(중간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으로 결국 모든 기업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된다. 그럼 이런 외부 환경에 제약을 많이 받는 조건을 제외하면 하나가 남는다. 바로 시간이다. 시간을 줄이는 것이 효율 증대이고 기술 혁신이며 기업의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제조업 기반의 산업구조로 성장한 나라의 생활 방식과 리듬이 왜 숨 가쁘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역사적으로 유럽(산업혁명) -> 미국 -> 일본 -> 한국 -> 중국 -> 인도, 베트남등)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상품과 제품을 만들어내어야 하는 숙명을 가진 문화는 결국 사람들의 삶의 형태까지도 그렇게 바꿔 간다. 부가가치를 올리는 효율을 위해 희생당한 가치들은 알지 못한다.

Cycle time

시간(Cycle time)을 줄인다는 건...


과거 나는 신제품이 출시되면 생산라인에 내려가 핸드폰의 타이머를 맞추고 각 공정을 돌아다니며 실제 제품 사이클 타임을 측정하고 또 새로운 공정의 동영상을 찍곤 했다. 그럼 생산라인에 작업자들은 라인 밖에서 서서 핸드폰과 자신들을 번갈아 보고 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본다. 나는 마치 동물원에 구경 온 관람객처럼 우리 안에 아니 라인 안에 갇혀 있는 작업자들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 댔다.


생산 라인에는 대부분 나이가 있으신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간혹 젊은 여성이 새로운 작업자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오래되신 라인 작업자 아주머니들은 나와 안면이 있어서 나의 행동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새로 온 들어온 듯한 한 젊은 여성 작업자가 내가 찍는 동영상이 불쾌했던지 왜 자신을 찍느냐면 강한 불만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실제 내부 원가 파악해야 하기에 현장 검증과 근거 자료 작성은 필수였다. 견적서를 만들기 위해 원가 담당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주어진 역할과 임무에 열정적인 행위가 누군가에게 인권 침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생산라인을 찍을 때는 되도록 작업자의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찍게 되었다. 그리고 사전에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마 그 여성 작업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계속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초상권을 침해했을 것이다.


우리는 큰 시스템 안에 소속되면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피해와 불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때론 그게 비윤리적이거나 혹은 범법인지도 모른 체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건 마치 전쟁이 군인에게 살인을 합법화 그리고 의무화시켜 버리는 것과도 같다.


“저는 회사에서 제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한 것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다. 면책이다. 회사에서 주어진 목표(영업이익률, 제품당 목표 이익률)를 달성하기 위해서 내가 고객에게서 받아내야 하는 가격의 목표가와 최저 방어선을 산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 고객은 달라는 데로 돈을 주지 않는다. 영업을 좀 오래 하다 보면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게 되고 내가 생각하는 가격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감이 생긴다.


“생산부장님, 이번 제품 사이클 타임이 너무 긴데요”

“아니, 제품이 이따 군데 어떻게? 변형 때문에 냉각 시간도 더 필요하고 또 조립 구조도 너무 복잡해”

“하아~ 이러면 이익이 나질 않아요, 무조건 사이클 타임을 줄여야 합니다”

“안돼 여기서 사이클 타임을 더 줄인다는 건”

“그럼 조립 공정에 사람 한 명 빼죠, 아까 보니까 조립 설비만 약간 수정하면 사람 한 명 정도 빼도 돌아갈 수 있을 거 같던데요”

“그건 안돼”

“왜 안 돼요?”

“요즘 이 임금 수준에 사람 구하기도 힘들어, 그리고 이제 좀 숙달된 작업자들을 또 내보내면 나중에 또 힘들어져”


시간을 줄여야만 한다. 아니면 사람을 줄여야 한다. 사람을 쓰고 버리고 하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시간을 줄이는 일이 쉬운 것도 아니지만 가장 최선과 우선은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그럼 쥐어짜는 방법 밖에 없다. 그렇게 제조업의 공정 기술이 발전을 거듭해 나간다. 물론 이 공정 기술은 최소한의 인력을 쓰는 기술까지 포함한다. 무인과 유인의 가장 적절한 배합을 통한 최소비용의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생산기술 혁신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제조 기업의 경쟁력이 된다.


나는 되도록이면 사람을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그건 사람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최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과의 싸움을 선택했다. 고객에게 제시할 사이클 타임과 내부 원가에 반영될 사이클 타임에 집중했다. 그 격차를 최대한 벌려 놓아야 내가 원하는 이익률을 확보하고 직원들의 연말 성과급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에 계속 예민해져 가고 있었다. 1분, 1초를 줄이고 최대의 이익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일상과 삶도 시간에 쫓기듯 살아온 것 같다.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항상 무언가 해야 하고 또한 생산적이며 효율적으로 해야 했다. 잠자는 시간은 비효율이다. 줄여야 했다.


그렇게 모든 일에 시간을 줄이는 것이 일상처럼 되다 보니 내가 가진 시간도 같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이 느끼는 시간은 거짓이다. 그것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우리의 느낌일 뿐이다…. (중략)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내용도 각각의 진행에 따라서 어떨 때는 더 느리고 어떨 때는 더 빠르게 일어난다. 나는 그 흐름을 붙잡을 수 없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이고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은 죽음으로 더 빨리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제한된 시간 동안만 의식을 가진 생명체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삶의 형태는 죽음에 빨리 다가가는 방식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모순이다.


우리는 종종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들 한다. 이건 시간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느낌을 얘기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시간의 실제와 느낌은 다른 것일까? 우리는 시간의 실제를 모른다. 오직 느낌만을 느낄 뿐이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나는 엉뚱한 상상을 즐긴다. 그런데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다 보면 이것이 아주 엉뚱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것을 알기 위해 계속 써내려 간다.


공간(3차원)과 시간(4차원) 사이 = 3.5차원


시간은 우리를 알지만 우리는 시간을 알 수 없다?! 왜냐 우리는 3차원에 머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차원은 선(x)이다.  2차원은 면(xy)이다. 3차원 공간(3D, xyz)이다. 그리고 우리는 3차원의 공간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의 시공간에 머물고 있다고들 얘기하곤 하지만 엄연히 우리는 3차원에 속해 있다. 시간(4차원)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차원까지만 본다, 엄밀히 얘기하면 보는 것은 2차원이다)

영화 [컨텍트, 원제 : Arrial] 중에서

"If you could see your whole life from start to finish, would you change things?

(네가 너의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볼 수 있다면, 넌 그것들을 바꾸고 싶어?)


- 영화 [컨텍트] 중에서 -


테드 창의 SF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원제 :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텍트]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다 보는 외계인이 등장한다. 외계인들은 무슨 일 벌어질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짜인 시나리오 대로 연기하는 배우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애드리브는 없다. 그것을 마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마치 과거 예수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이미 알면서도 그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만 했던 것처럼... 이건 인간에겐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4차원을 살아가는 존재에게는 이건 그냥 당연한 일일 뿐이다. 거부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그냥 받아들임이다.


4차원에 존재한다는 건 과거부터 미래까지 모두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4차원의 세계를 알 수가 없다. 뭐 영화처럼 우주 어딘가엔 4차원을 사는 생명체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4차원의 세계가 신의 세계가 아닐까, 아니 5차원도 있으려나?!.. 5차원은 상상도 불가하다) 어떨까? 자신의 죽음까지 모든 과정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는 건…


이걸 쉽게 이해하려면 1차원에 사는 존재를 상상해 보면 된다. 선 위의 세상이 전부인 존재는 절대로 2차원(면)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2차원(면) 세계의 존재는 3차원(공간)의 세계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차원이 높은 세계는 차원이 낮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동물은 좀 특이하다.

0차원에서 4차원까지

인간은 3차원에 존재하는 공간(부피와 질량)을 가진 모든 생명체가 인지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인지 능력을 가졌다. 다른 동물은 ‘시간’의 개념을 알지도 이용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4차원의 ‘시간’ 개념으로 다른 차원의 모든 것들을 측정(통계, 역사, 진화, 효율, 가치 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통해 측정된 모든 발전과 효율 그리고 혁신과 혁명으로 우리는 위인과 성인과 범인과 비범인을 구분하고 선함과 악함, 높고 낮음, 많고 적음을 구별하며 또 평가한다. 웃긴 건 인간은 뭔지도 모르는 시간의 개념만 차용했을 뿐 정작 시간(4차원)은 측정하고 평가할 수 없다. 볼 수 없기에…


“정작 그 자신은 측정이 불가함에도 우리 삶을 측정하고, 자신은 실제로 있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 시간이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어쩌면 인간은 3차원과 4차원의 사이를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3.5차원) 일지도 모른다. 신이 모든 차원을 창조했다면 신은 인간을 3차원과 4차원 사이에 가둬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 사이에 갇힌 채 평생을 살아간다. 제대로 볼 수도 알지도 못하는 시간을 가지고 모든 공간(3차원)의 존재들 위에 굴림하고 그들을 지배한다.  


만약 4차원을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이 본 인간(3.5차원)들이 어떻게 보일까? 답답하고 어리석게 보일게 분명하다. 이건 우리가 1차원과 2차원의 세계 속에 머무는(갇힌) 존재를 상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시간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기는 한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나는 시간을 마치 한 명의 어떤 인물인 듯이 느끼고 있으며, 그리고 잠들기를 원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지금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시간을 느끼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건 시간을 늘리는 것일까? 아니면 줄이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 시간에 쫓기며 살아갈 땐 느낌이 좋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은 좋다.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데 좋은 건 처음이다. 과거와 미래가 없는 현재가 만든 세계(또 다른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시간이 사라진 순수한 3차원의 세계에 머물 때이다.


지금 당신의 시간은 줄고 있는가 아님 늘고 있는가?!

지금 당신은 시간을 느끼고 있는가 아님 느끼지 못하는 가!?


불안의 서


- 오디오 영상 (릴스) -


https://www.instagram.com/reel/C29reGQRlJ6/?igsh=ZmE2dWpxYzQ2bWI0


이전 02화 괴로움과 경이로움 사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