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간(間) 자는 문(門) 가운데 해(日)를 품고 있다. 하지만 원래는 달(月)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문은 어딘가로 통하는 곳이고 우리는 그곳에 빛이 있길 바란다. 그 빛은 햇빛 일수도 있고 달빛일 수도 있다.
사이 간
몇 개월 전부터 “사이에서”라는 주제로 적지 않은 글을 적어 오고 있다. 나는 거의 대부분은 몰입(무의식)의 상태에서 글을 써내려 간다. 그래서 글이 어떤 주제와 의도를 품고 있는지는 나도 다 쓰고 나서 다시 퇴고를 하면서 그때서야 의식하게 된다. 물론 써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안갯속에 휩싸여 있던 글의 주제들이 조금씩 드러나지만 그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낼 만한 뚜렷한 단어나 문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주저리주저리 계속 개연성 있는 내용들과 생각 그리고 내가 새로이 알게 된 정보들을 근거로 계속 써내려 간다. 이것이 만약 사실(근거 있는 책, 영화, 타인의 이야기 등)과 나의 경험 위주라면 에세이나 혹은 칼럼 형태를 띠게 되고 만약 그것이 나의 상상과 추측 그리고 희망(꿈)을 품고 있다면 소설의 형태로 펼쳐진다.
글이 점점 속도를 올리며 문장이 되고 문단들이 이어지며 한 편의 초고가 마침표를 찍을 때쯤이 되면 그제야 주제와 제목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보통은 결말쯤에서 몇 가지 후보 제목들이 떠오른다. 만약 잘 안 떠오른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맞춤법을 점검하며 쓴 글을 다시 한번 훑어내려온다. 그러다 보면 제목의 후보가 될 만한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두 가지의 키워드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글을 쓰다 보면 나의 글은 (특히 에세이나 칼럼 같은 경우)는 제목을 정할 때 보통 두 가지의 상반 혹은 대립 그것도 아니면 연관되는 단어(내 생각에 그런데 나는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을 즐긴다)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글을 오랜 시간 읽어온 독자라면 이런 나의 성향을 이해하시리라. 나는 항상 어느 두 갈래의 경계지점에 서서 양쪽을 드려다 보며 글을 쓰는 것을 즐긴다. 요즘은 아예 내가 아닌 타자가 되어 나를 보는 자신을 타자화 시켜서 글을 쓰는 새로운 경험도 시도하고 있다. 이게 쉽지는 않지만 참 은근히 매혹적이고 흥미롭다.
내가 글을 쓰며 완전한 중립과 중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되도록이면 양면을 보려고 노력한다. 색깔과 입장을 가지되 그 색깔과 입장이 너무 치우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주제로 글을 쓰다 보면 두 가지의 상반되는 주제 혹은 단어 그게 아니면 상황들이 떠오른다. 이전에 썼던 글을 드려다 보면 글 속에서 티격태격 대고 있는 것을 두 자아를 자주 경험한다. 선악의 대결이라고 해야 할까? 이건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항상 고민하고 걱정하며 동물적(본능적, 욕망)이지만 또 인간적(이성적, 양심)인 척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신은 그렇게 인간을 모순의 상황 속에 집어넣었다. 그게 인간과 다른 생명체(동식물)의 가장 큰 차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나의 글 중 많은 글이 이런 형태와 성향을 띠고 있다 보니 최근에 아예 이 주제의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제가 정해진 것이라기보다는 글의 구성과 형식(문체)이 정해졌다고 해야 할까.
한자(漢字), 한(韓) 글의 어머니
[이성과 감성 사이] (2019.7.27)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적어온 600여 편가량의 글(에세이, 소설, 칼럼)들 중에 이런 류의 글들이 적지 않아 그 글들을 한데 모아 에세이 모음집을 만들었다. 그 표지를 뭘로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바로 사이 간(間)의 한자였다. 요즘처럼 한자를 잘 쓰지 않는 시대에 웬 한자일까 생각하겠지만 한국의 언어는 한자 문화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말은 모국어(한글)의 모국어가 한자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한글은 한자의 복잡함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독창적으로 탄생했다. 세종대왕의 어진 마음이 백성을 향해 누구나 한 번 익히면 쉽게 말하고 쓸 수 있는 문자의 대중화에 성공했다. 연구의 산물이다. 반면 한자는 유구한 시간이 만들어낸 변천의 산물이다. 짧은 시간의 연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긴 시간의 역사만큼이나 축적된 의미가 깊고 또한 복잡하다. 우리가 짧은 시간에 그 많은 한자와 그 한자의 각 부수들이 품고 있는 의미를 다 익히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이유이다. 대부분 중국어 공부에서 느끼는 가장 큰 장애물 또한 한자이다. 그래서 과거 글(한자)이 양반들의 전유물이 되었던 것이다. 한자는 오랜 인류(동양)의 깊은 생각을 품고 있다.
사실 나는 중국어를 전공했기에 한자가 익숙한 편이다. 한자를 알고 한글을 읽으면 다가오는 의미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아는 만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게 글을 쓸 때 한자어를 많이 쓰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려운 한자어는 한글에 한자표기를 달아주는 습관이 생겼다)
글을 오랜 기간 쓰다 보면 문장을 쓸 때 단어 선정에 신중을 요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 부분에서 나의 생각과 느낌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어떤 특정 단어가 필요하다. 그때 순수 한글은 하나이고 한자어 단어는 여럿일 때, 나에게는 선택의 폭이 많아진다. 내가 지금 전달하고자 혹은 느끼는 것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고를 수 있다. 어휘량이 많아지는 것이다. 내가 만약 한자를 모른다면 이 단어들은 모두 별 차이가 없는 같은 단어로 느껴질 것이다. 이건 독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독자가 만약 어휘량이 부족하다면 작가가 느끼는 생각을 그대로 전달받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또한 독자가 어휘량이 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서를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 이럴 때 쓰는 단어였구나”
책 속에서 글 속에서 앞 뒤의 맥락 속에서 독자는 굳이 그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지 않아도 그 단어의 느낌을 얻을 수 있고 이것이 반복되면 한자를 굳이 몰라도 그 한자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나는 독서에 취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 기껏해야 5~6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축적된 독서량이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책과 글 속의 의미들이 더 빨리 와닿는 것은 아마도 한자어를 남들보다 좀 더 많이 알기 때문이다. 맥락이 없어도 단어만으로도 맥락을 유추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에 독서를 더 하면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언어능력을 얻게 된다.
간단한 예로 ‘인간’(人間)이라는 단어를 보면 일반인(한자를 모르는)은 그냥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아마 영어에 익숙한 요즘 세대는 휴먼(Human)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관계)’를 함께 떠올린다. 왜냐 인간(人間 = 사람 인 人 + 사이 간 間 )이라는 한자가 품고 있는 뜻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단어 하나에 사람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단어이다.
수많은 종류의 글 속에서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인간을 표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표현과 생각을 극히 제한해 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글은 한자를 떠나면 그 생명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히 문학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쓸데없이 한자어를 남발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한글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한자를 이해해야 한다. 나는 나의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은 기본적인 독서력과 필력이 있으신 분들이라는 전제하에 글을 쓴다.
[사이에서]라는 주제로 글이 쌓여가면서 이것들 그림 혹은 형상으로 축약할 수 있는 모음집의 표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이 간(間) 자가 떠올랐다. 그런데 사이라는 의미에서 문(門)은 이해가 되었지만 그 가운데 왜 날 일(日) 자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본 사이 간자의 유래에서 뜻밖의 발견을 하게 되었다. 사이 간자의 원형은 閒(한가할 한)의 속자(줄임 자)였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사이 간자가 이 글자를 대신해 버렸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해와 달 사이
여기서 나의 상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달월과 날일 달과 해, 즉 음양(陰陽)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건 동양의 깊은 사상을 품고 있다. 보통 우리는 해와 달이라는 즉 양음(陽陰)으로 받아들이는 서양식 가치관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의 오랜 선조들은 달을 해보다 더 큰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루(해=日)가 모여 한 달(월=月)을 이루는 동양의 달력만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가?
이건 천자문의 시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우리가 천자문을 읽을 때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이라고 시작하는 부분에서 하늘은 검다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은 하얗고 푸르다’는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발상이다. 하지만 이건 우리의 생각이 뒤집힌 것이 아니라 원래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하얗고 푸른 것은 우리가 정말 좁은시야(세계관)에 갇혀있음을 의미한다.
해를 바라볼 때만 우리는 푸른 하늘을 본다. 태양빛이 공기 중에 산란하며 생기는 현상이다. 해질 무렵이면 하늘은 붉은색으로 변한다. 해가 기울며 파장이 길어져 색이 변한다. 우리는 태양의 현란한 움직임에 눈이 현혹된 것이다. 빛(태양)이 진짜 하늘을 가린 것을 알지 못한다. 사실 지구 밖은 온통 어둠이다. 검다. 그 시커먼 우주에서 점점이 별빛 만이 존재할 뿐이다.
태양신을 모시는 것은 서양에서 유래했다. 과거 서양에서 기독교(유일신)가 공인(313년, 밀라노칙령)되기 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태양신을 숭배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서도 계속 태양신을 숭배함, 기독교는 정치적 수단) 이건 태양 중심의 생각이 바로 서양에서 유래한 것임을 의미한다.
해와 달
빛(光)에는 두 종류가 있다. 빛이 만든 빛(깔)과 어둠이 만든 빛이다. 햇빛은 전자이고 달빛이나 별빛은 후자이다. 같은 빛이지만 사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빛을 바로 볼 수 있다. 어느 누가 태양을 바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눈이 멀어버릴 것이다. 빛과 어둠은 모순이자 상반되는 관계지만 서로의 존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항상 빛만 있고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내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진정한 빛은 어둠(고통과 시련)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 앎이라”
-[고린도후서] 1:7 -
사이 간(間) 자가 원래 문 틈 사이로 달빛(月)이 쏟아지던 형상(閒)이었던 것은 바로 어둠 속에서 빛을 보길 바라는 우리 선조들의 깊은 뜻이 스며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언제 어떻게 태양(해=日)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진정한 빛을 보려면 어둠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리를 얘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