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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23. 2024

문학과 과학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여덟 번째-

“가장 정확한 과학은 완벽하게 격리된 자신의 수도원에서 스스로 정한 법과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수학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세상에 뉘앙스를 가지지 않은 학문을 꼽으라면 무엇이 있을까?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단연 ‘수학’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혹자는 과학도 뉘앙스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아니다 과학은 증명되지 않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과학의 시작은 의도나 뉘앙스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항상 의도가 생기고 뉘앙스를 가지게 된다. 아니 이제는 과학은 그 시작부터 의도와 뉘앙스를 가지고 접근하고 또 연구한다. 국가와 정부와 기업이 과학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과학 또한 끝이 없는 학문이다. 과학도 욕망을 품고 있다. 또한 정치적 야욕과 자본적 욕심의 굴레에 묶여있다.


과학은 지금까지 증명되고 확인된 것들로만 세상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 판단과 규정은 증명되지 않은 많은 학문과 생각들을 경시한다. 그런 류의 학문은 철학이나 예술(문학, 음악, 미술등) 혹은 신학(종교학)과 같은 것들이다. 웃긴 사실은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철학이나 예술 혹은 종교의 베이스인 사색과 상상과 영감(感)의 세계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지없는 학문


수학은 그 어떤 과학적 발견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수학은 그저 과학적 발견을 표시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그 표현방식(표시)은 일말의 다른 여지가 없는 형태인 숫자와 기호로만 이루어진다. 수학은 닫힌 결말을 가진 학문이다. 빠져나갈 곳 없이 정답이 존재한다. 상상은 없다.


혹자는 수학과 과학이 서로 친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수학을 잘한다고 과학에 능한 것도 과학을 잘한다고 수학에 능하지 않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아니다. 과학은 발견이고 수학은 표현방식이다. 숫자를 잘 다룬다고 과학자가 되는 게 절대 아니다. 알다시피 아인슈타인의 수학실력은 그의 과학적 성과에 비하면 많 부족했다. 자신이 발견한 이론을 수학으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이건 마치 상상과 생각은 심오한데 표현과 연출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  


철학, 문학, 종교 같은 학문이 글이라는 허술하고 여지가 많은 형태의 문자를 쓰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래서 철학과 문학(예술)과 종교는 말이 많고 해석도 많고 분란의 여지도 많다. 왜냐 해석하기 나름이고 또한 수많은 언어들로 번역되며 그 뉘앙스와 의미와 느낌도 조금씩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은 아무 느낌이 없다. 전 세계 어디서도 수학은 그 어떤 다른 여지를 주지 않는 명확한 의미만을 전달한다. 누가 봐도 똑같다. 과학은 이런 수학을 이용(표현 = 공식, 규칙)해서 세상을 정의하고 여지없는 세상(명확한, Clear)을 꿈꾸는 학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여지가 많은 사색과 상상과 영감의 세계가 그 과학적 발견의 모티브가 된다.

수포자

나는 수포자


나는 문과다. 학창 시절 수포자(수학포기자) 중 한 명이었다. 수능시험 때 수학만 아니었다면 나는 수능을 그렇게 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나도 대학 간판이 바뀌었을 것이고 그럼 내 삶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지방사립대라는 간판은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나의 인격과 능력과 연봉을 깎아내려버린다. 그 모든 게 이 망할 수학에서 비롯되었다.


6년(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수학 수업 시간은 나에겐 공포의 시간이었다. 혹여 수업시간에 번호가 호명되어 칠판 앞에 서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간은 나에겐 학창 시절 가장 공포스럽고 괴로운 순간이었다.


“퍽 퍽 퍽!!”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 앞에서 분필을 든 채로 손을 떨고 있는 순간이 문제를 못 풀어서 매를 얻어맞는 시간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 어떤 상상의 여지와 한치의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 숨 막히는 공포가 싫었다. 너무도 명확하고 또한 정해진 결과만을 도출해야만 하는 수학은 나에게 고문이었다. 아마도 나는 어려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싫어했던 모양이다.


규칙은 더 많은 규칙을…


과학문명이 발전하고 그로 인한 산업과 기술의 발전이 사람들의 머리를 냉철하게 만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냉혹하게 만들었다고 생각지 않은가? 그건 과학문명이 닿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상상과 공백과 여지가 많다는 것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공식과 규칙과 법이 난무하는 곳은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그것들을 존중하게 된다. 법치 위에 인본이 있어야 한다. 법은 최소한이다. 인본이 무너진 세상에 법이 난무하는 법이다. 그럼 규칙(법, 공식)들을 만든 자들만 존경받고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을 증명해 내고 발견하고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공공연히 못 박아 버리는 게 세상을 더 완전하고 안전하고 쾌적하게 만들거라 맹신한다.


법(규칙)은 더 많은 법(규칙)을 만들어야 함을 모른다. 과학공식도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분화된다. 그렇게 수많은 수학공식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던가? 규칙과 공식으로 세상을 못 박는 자들은 사람들 위에 굴림하게 된다. 더 많이 아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과거 예수가 못 박힌 것처럼… 아이러니 한 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과거 그 많은 규칙(율법)들의 의미는 퇴색의 과정을 거쳤다. (구약 -> 신약) 예수는 율법(법과 규범)을 타파하는 자였다. 예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많은 규범과 공식과 관습이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예수는 그냥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그럼 그런 것들이 필요 없어진다고…


문학과 과학의 연결


요즘은 문학계는 SF문학이 대세이다. 문학과 과학의 만남이다. 바야흐로 연결과 융합의 시대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건 아주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건 이성과 감성의 만남이고 서로가 밸런스를 맞추는 시도이며 서로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김상욱(과학)과 김영하(문학)의 만남"  [알쓸인잡] 중에서

나도 글을 쓰지만 과학에 관심이 많다. 철학과 종교 그리고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과학으로 연결되며 신기한 발견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 발견과 상상을 칼럼과 에세이 혹은 소설 속에 녹여내고 싶다.


 나는 유신론자이다. 아직까지는. 신은 분명 모든 분야를 미묘하고 복잡하게 연결시켜 놓았다고 믿는다. 이제는 한 분야만 파는 시대는 저물어 간다. 그런 축적된 전문지식은 빅데이터와 AI 알고리즘이 다 찾아주고 해결해 줄 것이다. 앞으로는 이제 한 분야 전문가가 아닌 분야를 넘나드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시대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완전히 다른 분야를 들여다보면 뜻밖의 발견을 하게 된다. 인간이 그들과 차별화되고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연결시키고 융합시키는 일일 것이다. 숫자(기호=뉘앙스가 없는)와 문자(언어=뉘앙스를 지닌)는 서로는 배척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찾아가는 모순의 관계이기도 하다.


과학이 인류 구원의 해답?!


나는 과학 관련 유튜브를 즐겨보는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꿈꾼다는 것이다. 현재 닥친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선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선이라 주장한다. 허황되고 실현가능성이 떨어지는 철학적 윤리적 종교적 가치관을 통해 행동 양식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보다는 실질적인 솔루션을 찾고 빠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과학만이 그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틀리진 않다. 그 많은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보단 소수의 욕망을 끌어올려 다수의 욕망을 충족하면서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리학은 철의 열팽창계수는 알지만 우주 생성의 진짜 메커니즘은 알지 못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인류는 항상 과학기술에 의존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그 과학 기술이 또 다른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 왔음에는 한 발짝 물러서 팔짱을 끼고 바라본다. 과학은 순수한 의도로 접근할 뿐 과학적 발견과 성과의 악의적 혹은 오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한다. 그래서 그들은 과학은 뉘앙스가 없는 순수한 학문이라 주장한다. 그럼 수학과 과학이 같다는 의미이다. 말에 어가 있다. 수학은 의도도 결과도 모두 뉘앙스가 없다. 과학은 의도가 어떠했건 결과는 항상 뉘앙스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영화 [오펜하이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   오펜하이머 -


오펜하이머를 기억하는가? 최근 영화로도 책[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으로도 화제가 되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가 왜 악몽으로 시달렸는가? 뉘앙스가 없는 과학자가 나중에 왜 자신의 발견과 성과에 그토록 괴로워했는가? 위대한 과학의 발견 이면에는 항상 엄청난 재앙 혹은 위험의 반작용이 기다리고 있다. 당장의 눈앞에 큰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 뒤에 그 발견은 또 다른 재앙의 씨앗이 되곤 한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당장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며 지금껏 달려온 것이 발전이었고 또한 파괴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오펜하이머는 평화를 꿈꿨지만 파괴를 가져왔다. 모순이다.


우리는 의도한 것이 의도하지 않은 것도 가져옴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3차원에 살기에 시간(4차원)이 가져올 서서히 조여 오는 반전을 알 수 없다. 희망을 품은 의도 뒤에 결과는 절망일 수 있다. 갑자기 과거 내가 썼던 에세이[선행이 불행으로 변하는 경험]가 생각난다. 그때 너무도 순수한 선의에서 우러난 나의 선행은 결국 그에게 불행을 안겨줬다. 나는 그의 불행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돌이킬 수 없다.

 

“과학에서 확실하게 증명되는 것들은 모두 삶의 궁극적 목적에 비추어 보면 하등 쓸모없는 것뿐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개인적으로 더 많은 과학자들이 문학과 예술을 접했으면 한다. 물론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과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이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과학도 인간이 하는 학문이고 인간다움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과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 (인) 문학, 예술, 종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과거 위대한 과학자들은 공통적으로 그것들에서 과학적 영감을 얻었음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과학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은 감성을 지닌 동물이다. 과학은 감성이 부족하다. 또한 과학은 감성도 이성도 없는 메마른 수학으로 표현한다. 남아있던 이성마저도 삭제시켜 버린다. 우리가 그것들을 많이 접할수록 우리도 메말라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문학과 과학 사이에서

수학의 추억을 떠올린다.


[불안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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