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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12. 2024

괴로움과 경이로움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다섯 번째 -

“그리스도는 감성의 한 형태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 문장을 읽고 무슨 뜻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페소아의 문장이 매혹적인 것은 계속 뇌리에 머물며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의 문장은 읽는 순간 “으음?!”하는 어렴풋한 영감을 불러오지만 “아~하”하는 깨달음은 늦게 찾아온다. 하지만 그 영감이 깊어질수록 깨달음의 파장은 커진다. 마치 바다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지진이 엄청난 해일을 불러일으키듯이. 페소아의 글은 감성을 자극하지만 이성으로는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아니 더 많은 것 같다. 세상이 이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Emotional Chirst in Auburn


신학과 신앙은 분명 다른 것이다. 신학은 이성이고 신앙은 감성이다. 나는 신학도 신앙도 모두 관심이 크다. 역사적인 사실?! 들과 함께 기록된 인물들의 말과 행적들을 찾아보며 과거 성인들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내 안에 그들의 관념화가 시작된다. 이 관념은 내가 공부하고 찾아보면서 조금씩 그 관념의 윤곽이 드러나고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이 그 당시 겪었을 고통과 고난 그리고 처절한 고독을 눈을 감고 상상하며 감동받고 눈물 흘리기도 한다. 이 두 과정은 분명 다른 것이다.


전자는 머리로 생각하고 후자는 마음으로 느끼는 과정이다. 찾고 풀고 또 찾고 푸는 생각의 과정을 반복해 간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또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앎과 깨달음의 끝이 어디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끝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과정은 멈출 수가 없다. 이건 마치 중독과도 같아서 계속해서 구하게 된다. 삶이 반복되듯이 앎도 반복되는 것 같다. 삶도 계속 살아봐야 하고 앎도 계속 알아가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그는 괴로워할 것이다. 괴로워할 때 그는 경이로워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리라.”


-[도마복음] 2장 -


이 복음서의 구절이 요즘 들어 왜 이렇게 가슴 깊이 와닿는 것일까? 내가 종교와 철학 그리고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찾고 공부하고 구하면서 알게 된 그 내용은 여태껏 나에게 여러 가지 키워드들을 뇌리에 남기고 지나갔다. 그 키워드들은 나의 글 속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가장 많이 쓰고 생각나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모순’이다.


모순의 세계


우리가 왜 세상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건 결국 세상이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고전역학 vs 양자역학)도 종교(일원론 vs 이(다) 원론)도 철학(절대주의 vs 상대주의)도 모두 두 갈래로 나눠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다.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모순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우린 서로를 영원히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항상 이해하는 척만 할 뿐 우리는 절대 나와 다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 이 세상이 설명이 안되기에 그래서 신이 세상을 모순에 가둬놓은 것이라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자신이 만든 모순의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모순을 받아들이고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생각 없이 사는 사람 혹은 입장 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세상 살기가 힘들지만 또 세상 사는 게 신비로워진다. 그러니까 복음서의 ‘괴롭지만 경이로워진다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지금 나는 괴로움과 경이로움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 뒤의 ‘지배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아직도 어렴풋하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을 찾고 구하고 있는 과정인 거 같다.


이성적임은 감성적임을 함께


요즘 이성적으로 찾고 구하고자 하는 이 과정이 나의 감성을 더욱더 크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된다. 이성과 감성도 상반되는 모순의 관계 일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이려는 자는 지극히 감성적임을 숨기려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무언가를 계속 구하는 자는 자신 안에 억제되는 감성들이 점점 더 커져간다. 그런 자들은 그 억제된 감성들을 잘못된 방식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성에 억눌린 감성은 숨겨져서 은밀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자신이 감성적임 사람이면 안 되는 처지(직업, 환경, 관계등)에 있는 자들이다. 빛이 너무 강하면 우리는 그 빛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얼마 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삽질을 하다가 쓰러질 뻔했다. 뙤약볕은 피해야 한다. 그때 뙤약볕이 만든 짙은 나무 그늘 밑은 천국이었다. 어둠 속 천국을 맛보았다. 빛은 이성이고 어둠은 감성이다. 우리는 어둠을 부정한다. 하지만 어둠은 항상 존재하고 필요하다. 이건 반대로 먹구름과 비구름이 덥힌 오랜 어둠의 시간이 지속되다 구름이 걷히며 그 사이로 무지개와 함께 비치는 햇살을 맞이할 때와도 같다.  


나의 글은 이성과 감성이 섞여있다. 연말 연휴 한가한 시간 동안 과거의 글들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글들을 훑어보니 이성적인 글(칼럼, 서평등) 등과 감성적인 글(소설, 에세이등)들이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칼럼을 쓰다 보면 계속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고 싶어지고 또 그런 감성적인 글을 쓰다 보면 또다시 칼럼, 서평 같은 이성적인 글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글이 일관성 없이 뒤죽박죽이다. 이건 뭐 소설가인지, 평론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딱히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시간이 갈수록 이성적인 글은 더욱 이성적으로 감성적인 글은 더욱 감성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감성이 좀 더 세지는 시기인 것 같다. 소설을 많이 쓴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고독은 감성에 가깝다.


예수라는 인간


호주에 온 이후 예수의 행적에 대해 많은 것들을 찾아보고 알아보고 또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누군가 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져본 건 여자 빼곤 남자로는 처음이 아닐까? 이성의 유혹은 그 무엇보다 강하다. 오죽하면 창세의 어지러운 시작남녀의 갈등(아담과 하와)으로 묘사했겠는가? 그런데 오래 살다 보면 이성보다 강력한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는가 보다.

Jesus Chirst

아직도 예수에 대한 풀리지 않는 많은 궁금증들이 있지만 지금껏 내가 알아본 이 예수라는 인물은 인성도 신성도 모두 이상적이다. 완전한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인성과 신성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항상 있었다. 처음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이성(理性)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성적으로 그를 찾고 분석하고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많은 의문과 미스터리들이 생겨 났다. 이건 개인적으로 아직도 역사 속에 감춰지고 사라진 예수의 행적들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신학적 혹은 고고학적 사료들로는 이 예수를 모두 설명할 길이 없다. 사료들이 부족하고 접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과거 불태워지고 없어진 것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건 국가와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알고 또 누군가는 모르고 살아가는 것뿐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아니고는 중요치 않다. 내가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종교는 믿음을 그토록 강조하고 또 강요한다. 그런데 예수와 부처가 말하는 신앙은 사랑과 자비였지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은 인간이 인간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믿음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주객이 전도되고 앞뒤가 바뀌었다.

Starbucks in Burwood

“What’s your name?” (이름이 뭔가요?)

“Thomas! ” (토마스!)


유일하게 나를 '토마스'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 그(혹은 그녀)는 나를 모른다. 나도 그를 모른다.  그는 나의 이름을 테이크아웃 컵에 적는다. 그리고 잠시 뒤 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럼 나는 내 이름이 적힌 컵을 받아든다. 이름이 불려지고 싶을 땐 그곳을 찾아간다. 별다방으로.


언제부터인가 나는 ‘토마스’로 불려지길 원했다. 성경(신약)에는 많은 예수 제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피터(베드로), 존(요한), 메튜(마태), 제임스(야고보) 등등 이런 이름은 이제 정말 흔한 이름이 되었다. 서양에서는 주변에 한 두 명쯤은 다 있는 친근한 이름이다. 그 말은 그만큼 많이 알려지고 인기 있는 인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름은 의미를 품고 있고 작명(이름 짓기)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정체성을 희망하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전 세계 곳곳에는 예수 제자들이 가득하다. 다만 정체성은 다른…  


나의 원래 영어 이름은 ‘토마스’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를 알아가면서 알게 된 ‘토마스(도마)’라는 인물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정말 매력적이고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기독교(특히 개신교)에서 토마스는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새겨진 인물이다.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그의 부활을 몸소 확인했던 인물이다. 이전부터 나 또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by Caravaggio, c. 1602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바닥에 넣어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 [요한복음] 20:27 -


토마스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의심은 이성의 또 다른 표현 형태이다. 의심은 부정을 믿음은 긍정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의심이 풀리면 믿음이 강해진다. 이건 앞에서 설명한 이성적일수록 감성적임 증가를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감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관건이다.


만약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었다면 의심은 믿음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시간의 문제일 뿐 종착지는 같다. 만약 그가 사기꾼이고 불완전한 인간이었다면 의심은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예수가 가려지고 숨겨진 것이 있다면 의심이 모두 믿음으로 바뀌지 못할 뿐이다.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만든 불완전한 믿음이다. 알게 된 것은 믿게 되었지만 알 수 없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불안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게 바로 미스터리이다. 그리고 이런 신비함은 항상 우리를 끌어들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신비함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 궁금한 게 없으면 관심은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그래서 예수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는 것일까?


토마스는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의문이 많은 자였음이 틀림없다. 예수 부활의 기적 앞에서 찬물을 끼얹는 듯한 그의 질문은 다른 제자들은 감히 입밖에 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성적인 질문은 결국 그의 감성을 자극했고 그의 감성이 그리스도를 인정했다.


“너는 인도로 가라!”


예수는 그에게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걸 거부했던 그는 결국 전 재산을 잃고 거지가 된다. 그리고 결국 노예가 되어 인도로 팔려가게 된다. 그는 원래는 어부였는데 거기서 목수가 되어 예수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간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없는 자였지만 나중에는 가장 예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간 자가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그에게는 “디디무스(Twin : 쌍둥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토마스(Thomas)’는 쌍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예수와 실제 쌍둥이였는지 아니면 닮아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쌍둥이 형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리라 생각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로다. 그대는 내가 돌봤던 거품이 일고 있는 샘물을 들이켰기 때문에 취하였도다."


-  [도마복음] 13:5 -


예수는 자신의 제자를 부인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토마스는 무엇에 취한 것일까? 알 수 없다. 너무 뜬금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서에 이 글을 남긴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것 또한 내가 찾고 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뭣 때문에 쓸데없이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답할 길이 없다. ‘그냥’이라고 밖에.


보시다시피 지금 글은 이성적으로 의문을 해결해 가는 글이다. 이건 토마스가 했던 행위 즉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현대인들을 꼭 닮았다. 하지만 이 해결 방법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더 많은 고뇌와 번민을 안고 살아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억눌린 감성이 이성과의 평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날인가 예배당에서 찬양을 하다 나도 모르게 왈칵 쏟아지던 눈물을 기억한다. 그건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설명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계속 흐른다. 이상하다. 그런데 뭔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예배당을 나와 하늘을 보니 상쾌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리스도는 감성의 한 형태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괴로움과 경이로움을 이라는 감성 사이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The Book of Disquiet] in Mcdonald


오디오영상 - 릴스 -


https://www.instagram.com/reel/C2CLES_xmOw/?igsh=cTJjeGp3cW02bHB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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