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 스물세 번째 -
“나는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이다”
- 배수아,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서문 중에서 -
[불안의 서]를 번역한 배수아 작가도 불안했던 것일까, 그녀도 [불안의 서]의 늪에 빠져 적잖은 시간을 불안을 파헤치는 시간을 가졌던 모양이다. 요즘 나도 그렇다. 거의 두 달째 페소아의 책을 읽고 있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사라지는 듯한 경험을 한다고 해야 할까? 생각에 빠져드는데 그 생각의 주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통해 그 생각과 연결되는 기분이다.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나 사이를 걸으며 읽는다. 그 사이를 페소아가 연결해 주고 있다.
배수아 작가도 아마 나와 같은 기분에 취했던 모양이다. 그녀도 삶의 불안이 이 책으로 그녀를 이끌었고 이 책으로 불안을 드려다 보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불안을 잠재웠던 모양이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자의식(불안) 없이 살아가다 선악과(유혹, 욕망)를 먹고 자의식을 가지게 됨으로 에덴동산을 떠나게 된다. 그때부터 인간은 두려움 그리고 불안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 바로 신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원 입구에 서있는 저 두 개의 험악하고 무섭게 생긴 가디언(Guardian)은 당신 안에 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발리의 사원을 돌아보다가 통역가이드가 내게 해 준 설명이 잊히질 않는다. 왜 동양의 절과 사원의 입구에는 항상 무서운 형상의 조각상과 그림들이 있는지 몰랐다. 단순히 귀신을 물리친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고 나아가야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두려움과 불안을 피해 도망 다닌다.
나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불안을 가만히 드려다 보며 그 불안의 실체를 무의식으로 마주한다. 그 과정 속에서 태초에 인간이 만든 자의식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다시 내가 사라지고 불안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페소아는 이 책을 통해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에는 무언가에 취한 듯 그의 문장을 따라가게 된다. 이 오묘하고 신비한 경험은 마치 성경책처럼 두꺼운(약 800페이지) 두께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다.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이 책을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읽기 시작했지만 그의 글을 읽어가다 보면 자의식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그 무의식의 시간에 끌린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잊는 무의식의 시간을 가지는 것 같다. 이건 뭐라 말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계속 그 시간을 찾게 되는 중독과도 같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 ‘신비롭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예전에 며칠간 잠시 그 느낌 속에 빠졌다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최근 다시 그때의 느낌을 떠올라 그의 책을 구매해서 거의 2달 동안 그의 책만 읽었다. 이번 독후감이 그의 책을 읽고 쓴 24번째인가 25번째인가… 이젠 너무 많은 독후감이 쌓여 몇 번째인지도 헷갈린다. 그만큼 그의 책은 나에게 많은 사유의 시간을 던져 주었다. 내가 사유한 것들에 비하면 내가 쓴 독후감은 그것이 1/100도 되지 않는다. 책 속에 수많은 메모와 밑줄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들을 다 글로 옮길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현실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간들 때문에 모든 시간을 사유하고 쓰는데만 보낼 수가 없다.
“어설픈 현자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인지도 모른다.”
- 배수아,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서문 중에서 -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 바쁘고 정신없다. 수많은 유혹과 역할과 책임 속에 엮여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기는 지금처럼 복잡하고 바쁘지도 않았을 텐데, 그때도 이미 그것을 강조했다면 지금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나의 사회적 후천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역할들을 벗어던지고 남아있는 알맹이의 자아를 의미한다. 이건 태초의 벌거벗은, 자의식을 가지지 않았던 시절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도 같다. 그 상태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는 자신을 의식할 수가 없다. 왜냐 자의식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초의 아담과 하와는 자의식이 생겨나고 후손들이 태어났다. 이건 우리는 아담과 하와(성인이 된 상태에서)처럼 자의식이 없는 상태를 경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만 우리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가 그것에 가장 가까운 상태이다. 아이들은 자의식이 없다. 죄가 뭔지도 옭고 그름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냥 느끼는 데로 반응한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길을 잃는다는 뜻이다”
- 배수아,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서문 중에서 -
그래서 난 나 자신을 아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벗겨내고 또 벗겨내다 보면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지고 그때부터 보이는 세상과 끌리는 것들은 이전의 것들과는 달라짐을 느끼게 된다. 변화이다. 이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그럼 당신은 그것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 길이 세상이 요구하고 바라는 길과 다를 수도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그것에 계속 다가가면 당신은 세상과 멀어지게 된다. 이건 당신이 반사회적 혹은 반기업적 혹은 반국가적인 인간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건 다소 극단적인 두 가지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첫 번째는 현재의 세상과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저항과 혁명의 길을 가는 자들이다. 아주 고달픈 인생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명임을 깨달은 자들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것이 더 고문인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서 그것들을 바꾸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기억한다. 위인으로 남는 자들이다. 그들은 비록 현실의 삶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후세는 그들에게 명예라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선사한다. 그건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는 고귀한 가치들이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자들 있었기에 힘없는 자들도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을 사회와 세상과 격리시키거나 차단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소명을 이루려는 자들이다. 머리 깎고 절로 가거나 세속을 등지고 수도자의 길을 간다거나 하는 자들이다. 문제는 국가와 사회는 이런 자들이 많아짐을 원치 않는다. 국가와 사회의 발전과 부흥에 힘써야 할 국민과 시민들이 일손을 놓고 사회를 떠나면 국가의 GDP는 누가 올리겠는가? 그런 길을 가는 자들도 대부분 그 길을 가다 다시 세속으로 돌아오는 자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만큼 현실의 유혹과 욕망을 끊고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 이중적인 삶을 사는 종교인이 적지 않은 이유다. 그들은 소명과 생계 두 가지를 병행하며 사는 절충안을 선택한 것이다. 사람들을 이상세계로 인도하면서 자신은 그들을 통해 현실세계의 부와 물질을 채운다. 아이러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와 사회 그리고 종교와 신앙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이건 과거 중세 시대부터 시작된 오래된 숙명과도 같은 관계이다. 과거엔 신이 왕 위에 있었고 지금은 왕이 신 위에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이 신과 왕의 대결과도 같다.
신은 이상세계를 주관하고 왕은 현실세계를 주관한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의 영역을 간섭하고 침범하며 견제하는 관계이다. 역사적으로 그 과정 속에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다. 신과 왕의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가이사르의 것은 가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마태복음] 22:21 -
이 구절은 현실의 바꿀 수 없는 것들에는 순응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이상세계를 향한 의지와 마음을 버리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세상은 언제나 악이 존재하고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도 선을 지향하고 부조리와 모순을 인정하되 동화되지 말라는 의미라 생각한다. 물론 부조리와 모순의 바꿀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 상황을 견디고 때를 기다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과거 기독교는 그런 극심한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 더욱 간절하게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고귀한 것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피어남을 기억해야 한다. 조개가 오랜 시간 고통을 품어야만 진주를 품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자기-자신-모름을 참을성 있게 그리고 강렬하게 분석하고 우리 의식의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기록하는 일… (중략) 이보다 진실로 위대한 인간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없다”
- 배수아,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서문 중에서 -
페소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난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건 자신을 잊는 것이었다. 의식적으로… 페소아가 살아가던 시기 포르투갈은 정치, 경제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왕정이 붕괴되고 제1공화국(1910)이 수립되고 세계 1차 대전(1914~1918)이 유럽을 휩쓸고 있었으며 정치 불안으로 군사 쿠데타(1926)가 일어나 군부가 집권했다. 한국보다 40~50년 정도 빠르지만 비슷한 역사를 겪었다.
페소아는 이런 불안정한 사회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이상세계를 표현함에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의 수많은 이명(異名, heteronymous)의 탄생은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을 알고 난 후 수많은 이명들을 탄생시켜 의식적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 과정 속에 피어오르는 상념들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드려다 보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을 분리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과 또 다른 자신 사이를 오고 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신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글 속에는 신의 존재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것 말고는 그의 그 광활한 무의식을 설명할 길이 없다. 신은 그에게 의식적으로 무의식에 닿는 길을 알려 준다. 그는 평생을 그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오고 가며 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가 죽고 난 후 세상에 드러났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마태복음] 6:3 -
그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인으로 추대되는 것은 성경 속 말씀을 삶의 끝까지 실천한 작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당신은 어떤 나과 나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