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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Sep 04. 2024

꽃과 나 사이

내가 꽃을 좋아하는 이유 (부제 : 나는 소나무다)

아침마다 공원을 산책하며 산책로 주변에 핀 꽃들을 발견한다.


나는 꽃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꽃에게 다가간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들은 아침 햇살을 맞이하고 다시 꽃잎을 열 준비를 한다. 밤새 움츠렸던 꽃잎을 다시 펼치고 햇살을 향해 자신을 드러낸다. 빛을 향해 자신을 활짝 드러낸다. 꽃은 빛을 사랑한다.

A flower with sunshine in Castlehill

    



나는 언제부터인가 길가에 핀 꽃을 보면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등산을 할 때도 공원을 걸을 때도 꽃만 마주치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것들을 가만히 드려다 보고 그 꽃들을 사진에 담는다. 그래서 나의 핸드폰에는 수많은 꽃 사진들도 가득하다. 각양각색의 꽃들을 보고 있으면 그 어느 것 하나 같은 꽃이 없다. 각자 저마다의 색깔과 형상을 가지고 있다. 나는 보통 꽃 사진을 찍을 때 아웃포커싱으로 꽃에 집중해서 찍는다. 그리고 항상 꽃과 배경을 원근감 있게 찍으려 한다. 왜냐하면 내가 다시 그 사진을 봤을 때 그 꽃을 만난 시공간을 떠올리기 위해서이다.

New Farm Park in Brisbane

희미한 배경은 나의 기억들로 다시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물론 시간이 많이 흐르고 다시 그 사진을 봤을 때 흐린 배경이 떠올린 기억이 사실과 맞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치 않다. 내가 기억을 떠올릴 단서만 제공하면 그만이다. 줄거리만 떠오르면 나머지 디테일은 상상이 만들어 간다. 


내가 사진을 찍고 시간이 흘러 그것을 다시 보는 것은 사실을 떠올리려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상상을 떠올리기 위함이다. 너무도 선명한 사진은 오히려 느낌과 상상을 방해한다. 우리는 희미하게 안갯속에 휩싸인 듯한 모습 속에서 상상이 피어오른다. 마치 꿈속처럼... 희미한 기억은 상상으로 채워진다.

Flowers in Brisbane

예전에 브리즈번 기차 여행 때 도착한 역(Roma St Station) 뒤에 있는 공원에 갔다가 꽃들의 향연에 빠져 그날 거의 반나절을 거기서 보냈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나의 발길을 잡아두어 공원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찍은 꽃 사진이 엄청나다. 나의 여행은 언제나 나의 시선과 관심을 끄는 새로운 것들을 만나고 그것에 붙들려서 돌아다닌다. 그래서 나의 여행은 디테일한 계획이 없다. 목적지의 항공편 티켓과 잠잘 곳만 정하면 된다. 일상의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다. 여행지의 모든 것은 새롭다. 일상을 벗어나면 모든 것이 새롭다. 여행의 의미는 내가 어떻게 보고 느끼냐에 달린 것이다.

Flowers in Sydney

아웃 포커싱된 꽃 사진은 내가 꽃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꽃을 바라보면 다른 것들은 주변부로 사라진다. 내가 길을 가다 멈춘 것은 꽃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들이 나를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나와 꽃만 존재하는 순간이다. 마치 내가 소설을 쓰며 현실은 주변부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렇게 나는 잠시 동안 꽃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시스템은 다양성을 모두 담을 수 없다


꽃들이 모두 다르다. 세상에는 약 30만 여종의 꽃이 있다고 한다. 인간을 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도 저마다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각양각색이다. 인간의 종류도 30만 여종으로 나눌 수 있을까? 인간이 꽃을 구분 짓듯 인간도 구분 짓고 분류한다. 피부색, 국가별, 민족별, 혈액형별, MBTI별등등 하지만 꽃의 종류만큼 많을 수는 없다. 인간은 신이 만든 인간을 분류하고 분석하려 끊임없이 발버둥 치지만 꽃의 종류만큼도 분류하거나 분석해 내지 못한다.

Flowers in Bali

인간은 꽃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 이 무한에 가까운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다들 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다양성은 시스템을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든다. 인류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더 많은 규칙과 법칙과 약속들이 생겨나는 이유이다. 그래도 이 다양함을 모두 포용할 시스템은 만들어질 수 없다. 인간은 신이 만들 세상을 시스템에 넣을 수가 없음에도 계속 그것에 도전하려 한다. 그래서 항상 시스템은 문제를 만들고 희생을 초래한다.


인간 세상은 이해와 공감과 서로 간의 약속이 존재한다. 꽃들은 여러 종류의 꽃들이 모여 꽃밭을 이루고 꽃다발을 이루며 조화를 이루지만 인간은 모이고 뭉치면 더 큰 힘이 발휘하지만 또한 갈등과 분열 같은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자연은 모순이 없지만 인간은 모순인 이유이다.

Flowers in Saigon

모순에게 비모순을 선물한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꽃들처럼 모순 없이 살 수 없기에 꽃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일까? 꽃을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꽃을 좋아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자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여자들 대부분은 꽃을 좋아한다. 꽃을 싫어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꽃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한다. 아주 고전적인 방식이며 이건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와 같다. 여자는 왜 꽃을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여자가 남자보다 꽃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여자가 더 모순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여자는 좋아해도 안 좋아하는 척하고 드러내고 싶지만 가리려 하고 이성적 인척 하지만 아주 감성적인 모습들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오랜 시간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모순적이다.

Genesis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고 살고 대신 채우시고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 [창세기] 2:21-


신은 모순 없던 세상에 모순을 던져주었다. 모순의 시작이고 세상의 시작이다. 그리고 신은 남자에게 여자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끌어안으라고 했다. 모순을 품으라 했다. 남자의 몸에서 여자가 난 것부터가 모순 아니던가. 내가 세상을 모순이라 생각하게 된 이유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여자가 꽃을 그토록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것 때문 아닐까. 모순은 모순 없는 것을 사모한다. 이건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 우리가 순수한 아이를 바라볼 때의 그런 모습과도 같다. 비순수는 순수를 선망한다. 그럼 내가 꽃이 점점 좋아짐은 모순적이 되어감일까...


사랑의 고백은 언제나 꽃이 함께 한다.  화훼 산업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이다. 안타깝지만 꽃은 여자의 손에 건네지는 순간부터 시들어 간다. 이상하다. 사랑은 고백하고 표현해야 하지만 고백하고 표현하면 그 사랑은 시들어간다. 표현하기 전에는 커져가기만 했던 사랑이었다. 커졌기에 표현했지만 표현함으로 시든다. 꽃이 피면 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다. 여자는 시들지 않으려 하기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건 아닐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 한다. 모순이다.


“꽃을 왜 좋아하세요?”

“아름답고 예쁘니까요”


여자에게 꽃을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아주 일반적이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특이할 것 없는 이유이다. 여자는 꽃이 가진 외면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다. 아름다운 색과 향기를 가지고 싶은 여자들의 욕망이 꽃에 투영되어있다. 예쁘고 향기 나는 꽃은 벌과 나비가 찾아든다. 이건 여성(암컷)이 수컷(남성)을 유혹하는 동물 세계의 법칙과 같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 예쁜 것과 아름다운 것에 매료되는 근본적인 목적이 내가 필요로 하는 다른 대상의 이목과 관심을 끌기 위함이다. 그 목적은 유전자의 존속이다. 번식이다. 자연 세계는 언제나 번식을 통해 존속한다. 인간은 단지 동식물과 차별화하기 위해 ‘번영’이라는 말로 바꿔 쓸 뿐이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이유


오랜 시간 꽃을 보고 찍으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글을 쓰면서 설명하는 능력을 가진 듯하다. 그 이유를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의 종류와 꽃의 종류의 개수는 같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도 다르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좀 더 높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 C Chat GPT에게 물었다. 다행히 내 생각이 맞더라. 모든 식물이 꽃을 피우진 않는다. 꽃을 피우는 식물은 속씨식물에만 해당한다. 그 이외의 식물(겉씨, 선태, 양치)은 꽃을 피우지 않는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빛이다


꽃을 피우는 속씨식물은 빛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식물 종류의 대부분(약 90% 이상)이 여기에 속한다. 내가 오랜 시간 공원을 산책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꽃은 항상 햇볕의 방향을 따라 조금씩 움직인다는 것이다. 꽃은 언제나 빛을 바라본다. 빛에 자신을 활짝 드러낸다. 꽃들은 빛이 가리는 것을 싫어하더라 그래서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꽃잎을 움츠리고 다시 뜰 해를 기다린다.


하지만 다른 식물은 빛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물론 다른 식물도 빛이 필요하다. 하지만 빛을 원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식물도 있고 음지에 숨어 새어드는 은은한 빛만 이용하는 식물도 있다.

겉씨식물(소나무)

빛을 그리워하는 식물 (겉씨식물, 약 1%)


빛을 사랑하지만 환경이 여의치 않은 식물이 있다.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겉씨식물들이다. 이들은 대부분이 침엽수이다.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광합성을 위해 빛을 필요로 하지만 환경이 여의치 않다. 혹한과 바람 같은 극한의 환경 속에 꽃을 피우고 잎을 크게 벌릴 수 없다. 그러다간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폭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혹한 바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빛을 바라보며 최소한의 빛만을 흡수한다. 빛에게 자신을 모두 드러내지 못함을 언제나 아쉬워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산 꼭대기의 바위 위에 우뚝 솟아난 소나무는 언제나 태양을 바라보지만 꽃을 피울 순 없다.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빛을 바라봐야 할 운명이다.

선태식물(이끼류)와 양치식물(고사리류)

빛을 두려워하는 식물 (선태 약 5%, 양치 약 1%)


음지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이 있다. 빛이 필요하지만 싫어하는 존재이다. 이끼류나 고사리(포자) 같은 식물들이다. 그것들은 빛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빛이 없이는 생존할 수도 없다. 필요하지만 두려워하는 식물들이다. 식물은 기본적으로 광합성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광합성은 빛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음지와 그늘에 숨어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이용한다. 어둠 속에서 빛을 이용하는 것들이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두 쌍씩, 네가 데리고 가거라”

-  [창세기] 7:2 -


얼마 전 교회 예배당에서 읽은 성경 속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다. 신은 왜 노아에게 부정한 짐승까지 함께 방주에 넣으라고 했을까? 빛을 싫어하고 악을 선호하는 것들도 함께 데려가라고 했다. 신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해야만 빛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The image of the Genesis Noah carrying many kinds of animals on the ark

모든 생물은 빛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빛에 자신을 드러내는 생물들과 빛을 가리고 숨어 사는 생물들이 존재한다. 서로는 서로를 시기 질투하며 공존한다. 그 과정이 바로 서로를 바로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서로의 존재와 정체성을 알려면 반대의 것들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정결한 것의 숫자와 종류를 더 많이 데려간 것은 신이 빛과 선을 지향함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


- 꽃들도(花も) 중에서-


요즘 새벽에 글을 쓰기 전에 항상 듣는 노래이다. 왜 이 노래가 계속 끌리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꽃이 가진 능력과 성질을 부러워함일 것이다. 나는 아마도 소나무 같은 겉씨식물이 아닐까? 빛을 바라보고 선망하지만 내가 처한 환경이 나를 빛 앞에 과감하게 그리고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길을 가다 꽃을 보면 계속 멈춰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던 것이리라. 꽃은 꽃을 바라보며 부러워하지 않는다. 꽃은 빛만 보기 때문이다. 나는 꽃을 본다. 나는 꽃이 아니기에 꽃을 보며 부러워한다. 꽃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소나무인가 보다.

꽃을 피울 수도 없고 어둠 속에 있을 수도 없는...


The image of a pine tree towering on top of a mountain facing the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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