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건은 퇴사 후 며칠간 이색적인 경험의 시간을 가졌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번잡한 출근길에 섞여 회사가 아닌 영화관으로 향했다. 평일의 이른 아침 영화관은 마치 자신만을 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집 안에 홈시어터에 대형 TV까지 갖추고 영화를 봐도 영화관에서 보는 것만큼은 아니다. 다만 영화관에선 붐비는 사람들의 열기와 소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평일의 조조 영화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직장인일 때는 느낄 수 없었다. 단 돈 만원도 되지 않는 가격에 이 넓은 공간을 혼자서 누릴 수 있는 건 평일의 백수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택건은 조조 영화를 보고 나온 후백화점 안을 구경했다
“와... 평일 오전에도 사람이 꽤 있네”
백화점 안에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브런치를 먹었다. 늦은 오전 주변에는 삼십대로 보이는 주부들이 한 손으로는 아이의 유모차를 흔들며 한 손에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커피와 함께 브런치를 먹으며 서로 육아 정보와 남편의 뒷담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처음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으려 머리에 블루투스 헤드폰을 썼지만 그들이 나누는 뒷담화가 흥미로웠다. 그래서 헤드폰 음악을 음소거 한 채 책을 읽는 척하며 그녀들의 브런치 대화를 엿들었다.
그렇게 얼마간 브런치를 먹으며 주부들의 세계를 염탐했다. 그렇게 퇴사 후 몇 주 동안을 회사원으로서 해볼 수 없었던 이색적인 체험들로 흥미로운 나날을 보냈다. 돈을 벌지 않는데도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물론 이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상 아니 사회에 속하지 못한 존재가 느끼는 공허함 같은 것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항상 빠르게돌아가는세상속에서자신의시계만멈춰있는듯한느낌을지울수가없었다. 그는낮이면만날사람도그렇다고마땅히갈곳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집주변에 있는공공도서관이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주변에 생각보다도서관이많았다. 매일이곳저곳다른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마치 여행다니듯 도서관 체험의시간을 가졌다.
그는어디서든자신의존재감을찾아야했다. 그대로있다간자신이사라져버릴것같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조금씩자신을엄습했다. 그래서그는도서관에처박혀닥치는대로책을읽기시작했다. 혹시나책속에서자신을찾을수있지않을까하는기대를하며 책들을 탐독했다. 표면적인이유는그랬지만사실택건은현실의자신을잊기위한가장건전하고저렴한방법을찾은것이었다. 독서가 일종의 가장 현명한 도피처라 생각했다.
택건은시드니행편도비행기표를발권했다. 새로운세상으로떠난다는두려움보다명함없이사람들을만난다는두려움이더컸다. 비행기표를끊고나니모든일이일사천리로진행되기시작했다. 데드라인이정해지면그안에모든가능한일들을마무리지어야만했다. 한국이라는현실에엮여있는모든것들을끊어내고정리해야했다. 마치 수많은링거바늘이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링거 바늘은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피 같은 돈들을 빼내가는호스들이었다. 그것들을모두떼어버려야했다. 집, 차, 핸드폰요금과각종보험료, 공과금 등등.달마다빠져나가는돈줄을모두끊어버렸다. 그때서야택건은 자신의 몸에 얼마나많은호스관들이연결되어있었는지깨달았다. 환자가되어서링거를꽂는건지링커를꽂다 보니환자가된것인지헷갈렸다.
“야, 왜이렇게연락이안 됐냐?”
“어, 야좀많은일들이있었다”
“무슨일이길래?”
“나죽다살아났다”
“그래다행이다아녔으면내가죽일뻔큭큭”
다행히호주로가기전에수호와연락이되었다. 그는대략적인교통사고의전말을 택건에게 설명했다. 택건은그의사고소식을듣고나서야 그동안 연락두절에대한그의불신이사라졌다.불신뒤에생겨난믿음은그전보다더강해진다. 그가살아난것은그에게도기적이었지만택건에게도 유일하게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해 줄 하나링커바늘이 남아있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만은 끊어지지 않길 바랐다. 희망이 부활했다.
택건은오직자신만을믿고의지했다. 하지만그런자신이 만든현재의결과는 초라했다. 그곳에서꺼내줄수는있는유일한사람이수호라고생각되자그에게근거없는 무한한 믿음이생겨나기시작했다. 그믿음은논리적으로합리적으로정량적으로설명할수없는것이지만아주강한 것이었다. 택건은종교에심취하는사람들의심리가이러한것이아닐까생각했다. 만약그렇다면그들도아마그모든상황이만들어낸믿음일것이라는생각이들었다. 자신을 궁지로몰아넣은세상이만든믿음이다. 그믿음이사라지면더이상살아갈용기도희망도없는상태에놓인다는것을알기에그들은그어떤사실적인논리적인설명과해석이없이도믿을수있게되는것이다. 그리고그믿음을건드리는자는용서할수없다. 그건 하나 남은 유일한 동아줄을 잘라내려는 살인자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뉴스에서보는사이비종교추종자들이믿기힘든만행을저지르는모습을볼때면그들을이해할수없었는데지금은그마음을조금은이해할것같았다.
“이제태초의인간으로되돌아왔네”
모든현실의링거줄을끊어냈다. 이건마치어머니의탯줄을막끊어낸상태와같았다. 모체와분리된그잠시의순간은아직세상의어떤것과도연결되지않은가장순수한상태였다. 하지만그건아주잠시의순간일뿐이다. 순수함은더럽혀지며생명을이어간다. 다시모체의에너지를흡수해야만한다. 그에너지속에는모체가지닌다른불순물도함께섞여들어온다. 순수의오염이시작되고생명의연장이시작되는순간이다. 수호가 택건에겐 그런 존재가 되었다.
비행기의 엔진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활주로로 나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고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곧 비행기가이륙하고조금씩멀어지는고향 땅을 카메라에 담았다.땅이구름에가려시선에서사라지면서그모든시선들로부터자유로워짐을느낄수있었다.수 없이 많이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다녔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편도행 비행기는 그렇게 익숙하고 지겨운 시공간에서 멀어져 갔다.
"와... 이거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완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된 것 같네"
택건이 호주에온이후새로운 삶에 적응하면서 한국에서당연하게생각했던것들이이곳에서는당연하지않다는것을알게되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언어도 환경도 새롭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시공간은 불혹을 앞둔 택건을 어린아이로 바꾸어 놓았다.
'당연하지않다는것을받아들이는순간새로운것을얻을수있다'
익숙한것을포기해야만새로운것을얻을수있다는 글귀를 도서관의 어느책자속에서읽었다.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부가 설명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책이나 위와 같은 비슷한 류의 글귀는 많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진 않았다. 저자들은 과연 그게 과연 어떤 건지 제대로 알고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들도 책에서 본 걸 토시만 바꿔서 옮겨놓은 건지 의심드러웠다. 택건은 지금 홀로 새로운 세상에 떨어져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택건처럼 그걸 알지 못하는 건독서가삶으로이어지지않았기때문이었다. 왜냐독서는 그저 간접체험일 뿐이기때문이다. 물론그것이독서의목적이자의의이다. 시공간의제약으로세상을모두체험할수없기때문에인간은독서를통해그것을알아간다. 타인과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손쉬운 방법은 손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래서독서만하는자들은이해(理解)에는능하지만공감하지는못하는사람들이다. 안타까운건이런이해하려는노력조차않는사람들이대부분인곳이세상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