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직원들은 두 세명이 모이면 다들 전기차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다들 자동차 바닥에서 밥먹어 먹고 사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이 자동차 산업의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면 언제 어떻게 깡통을 차게 될 지 몰랐다.
T회사는 자신들이 개발한 전기차 관련 특허를 모두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 오픈하면서 더 많은 관심을 집중 시켰다. 상식을 뒤집었다. 모두가 자신의 노력으로 개발한 기술을 특허로 보호하고 독점하려 하지만 그는 반대였다. 세상의 변화는 항상 한 명의 또라이에서 시작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 과거 스티브 잡스의 전화기과 컴퓨터을 손에 들고 다닌다는 발상이 세상의 스마트 폰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듯이, 그는 이제 자동차에 컴퓨터를 연결시키려 했다. 들고 다니는 컴퓨터에서 타고 다니는 컴퓨터의 시대를 선도하려 했다. 이건 인간의 이동하는 모바일 본능을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손에 들고 다니는 것 보다 타고 다니면 더 빠르다. 온오프라인의 동시 가속화가 진행된다.
택건이처한상황을알게된여자친구는그사실을받아들일수없었다. 그녀는한국에서쌓아둔모든것을버리고택건을따라갈용기가없었다. 그렇다고결혼과동시에생이별을하고 서로 다른 시공간에 머물며법적부부로만살아가야하는현실을받아들일여자도아니었다.
그문제가 붉어지고둘사이엔 불화가 시작되었다. 적잖은 시간 교제하며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오며 돈독해 졌던 관계가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해결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선 서로가 냉혹해질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의 일부를 포기하는 헌신과 희생은 언제나 내가 아닌 상대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보장되지 않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연한 믿음보다 눈에 보이고 지금 내가 만지고 가지고 누릴 수 있는 현재의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럼 내가 그만둬?”
“…”
택건의 물음에 그녀는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도 하지 못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택건도 이제 적잖은 나이에 다시 이직을 하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현재와 같은 분위기에서 자신이 받는 연봉을 유지하며 자신을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든 사람을 줄이려는 분위기 속에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 상책이었다.
결국결혼얘기는무산되었다. 사랑은 이상적이지만 결혼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사랑을 해도 결혼은 하지 말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사랑없이는 인간답게 살 수 없지만 결혼은 하지 않아도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가둬두려는 인간의 기발했던 생각은 오랜 시간 이상과 현실을 묶어 놓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묶어놓은 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며칠뒤사내게시판인사공고란에는새로운인사공고가올라왔다. 영업부의과장이었던그를현장자재창고로 재발령낸사실을확인할수있었다.전래없던 일이었다. 인사발령이 번복되는 건 창사이래 처음이었다. 사내에서는그를둘러싼루머들이떠돌기시작했고사무실내직원들이그를바라보며웅성대는소리는마치택건 혼자다른차원의시공간속에있는듯한느낌을받게했다. 그는 섞여있어도섞이지않은기름같은존재가되었다. 택건은 영업팀 사무실 한쪽 구석에덩그러니놓여있는자신의 사무용품박스를들고조용히공장동에있는자재창고로내려갔다.
모두가 출근한 월요일 오전, 집 주변은 한산했다. 모두가 일터로 간 시간 일터가 아닌 집터 주변을 산책했다.
“이게 무슨 꽃이지?”
집 앞 화단에 핀 꽃에 시선이 멈췄다. 이곳에 산지 5년이 넘었지만 집 앞 공터 화단에 이런 꽃이 피는 줄도 몰랐다. 분홍색의 꽃잎에 마치 실핏줄이 퍼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름을 검색했다.
“달맞이 꽃? 달맞이 꽃이 왜 낮에 피었지? 큭큭”
왜 달맞이 꽃이 낮에 피었나 했더니,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에는 꽃을 피우다고 한다.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말 없는 기다림의 사랑?!”
꽃말이 인상적이었다. 달빛을 기다리며 강렬한 태양빛을 피해서 피어나는 꽃이었다. 대부분이 꽃이 밝고 강한 태양빛을 바라보며 피어나지만 이 꽃은 밤의 은은한 달빛을 기다리는 꽃이었다. 다들 피어있을 때 닫혀있는 꽃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홀로 피어난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꽃은 달빛이 환해지는 날을 기다리며 매일 밤 피어난다. 한 달에 한 번쯤 달이 환하게 비출 때 꽃은 빛난다. 그리고 그 빛나는 날을 위해 누구도 보지 않는 어둠 속을 꽃피운다.
택건은 그 동안 집 앞에 피어있었던 달맞이 꽃을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 날 밤에 맑은 하늘에 보름달이 떴다. 택건은 다시 집 앞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