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독서토론 모임에서 했던 한 여성의 말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 독서 토론의 주제는 [인간의 흑역사]였다. 책은 인류사에 길이 남을 놀랍고도 황당한 인간의 흑역사들을 모아 놓았다.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의미 있게 읽은 흑역사들을 서로 얘기했다.
"첫 결혼은 저에게 흑역사예요"
그리고 토론은 마지막 발제문은 각자 개인의 흑역사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옆에 앉은 한 여성의 말이 사람들을 이목을 끌었다.
“성숙하지 않은 인간일 때 했던 결혼은 흑역사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흑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문화적 제도적인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특히 정신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젊은 시절에는 더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 여성분은 그런 점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인간이 범할 수 있는 흑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인간의 시스템으로 봤던 것이다.
[인간의 흑역사] 톰 필립스
정신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기르는 과정은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많은 남녀가 그런 성숙되지 않은 사랑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는 말은 사랑은 이상이고 삶은 현실이기 때문이 아니던가 사랑하고 삶을 함께 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인내해야 하는 과정이지만 젊은 시절에 정신이 미성숙된 단계에서 그걸 알리가 만무하다. 그건 우리가 청년시절 대부분을 공부와 취업준비만을 위해 모든 시간을 쏟아부으며 인간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이 세상의 요구 그리고 본성에 따라서 결혼이라는 것에 골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결혼에 골인'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은 결혼이 마치 축구 경기의'골'처럼 삶이라는 게임의 목표처럼 여겼기 때문 아녔던가. 대부분의 남녀는 끌림이라는 느낌과 물질적 조건만 충족되면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인간은 찰나의 느낌과 현실의 물질로만 살 수 없다. 느낌은 너무도 변화무쌍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그것에 의존해서 두 남녀가 합쳐졌다면 분명히 위기가 닥칠 수밖에 없다. 물론 결혼 생활에 위기가 없을 순 없겠지만 이런 결혼은 그 위기를 극복할 내공과 지혜가 없다. 과거엔 부모 세대들은 제도를 벗어남과 주변의 시선 그리고 자녀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것을 견디며 지지고 볶으며 어떻게든 함께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되묻는 시대이다. 생각과 의식이 바뀌었다. 내가 더 소중하다. 바야흐로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하고 개인주의가 우선되는 시대가 아니던가. 물론 다양성과 개인주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가 우선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존재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다 것이 ‘타인도 그렇다’는 전제가 있고 없고에 따라 그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타인은 안중에 없고 나만 있다. 이기주의를 개인주의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서고 중심이 잡혀야 하지만 그런 과정 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정신은 성숙은 언제나 육체보다 느리다”
모두가 동의하는 말일 것이다. 제도(법과 시스템)가 사회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듯 인간의 정신도 육체의 성장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 이 시간차로 인해 우리는 많은 흑역사를 만들어 낸다. 그 여성은 결혼도 그런 관점에서 접근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뭣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지겹도록 싸웠죠,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어요”
몸에 난 상처는 아물지만 마음에 난 깊은 상처는 시간이 가도 아물지 않는다. 트라우마가 되어 해마 속에 잠들어 있다가 수시로 나타나 자신의 뇌를 마비시키곤 한다. 우리의 육체는 사춘기가 지나고 왕성한 발육과 함께 강력한 성적, 생리적인 욕구가 생겨난다. 이 시기에 남녀는 가장 건강한 자녀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육체를 갖는다. 이 시기를 놓치면 생명은 갖기도 힘들고 가져도 위태로워진다. 이런 육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의 시간적 괴리가 삶을 고통 속으로 집어넣는다.
“이제 나이가 들고 책도 좀 읽고 하면서 왜 그랬는지 좀 알게 더라고요”
이제 삶이라는 경기가 후반전으로 넘어가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삶이라는 것이 하루하루가 알려주지 않던 것을 한해 한 해가 알려주기 마련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오래도록 참지 못해 많은 흑역사들을 만들어 낸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음… 글쎄요 전 지금이 좋아요, 나이 들었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예전에 너무 힘들게 행복을 쫓았다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작년에 과거 회사를 다니면서 참 지겹게 밀고 당기며 일을 했던 고객사의 직원과 7년 만의 재회의 자리에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는 마흔을 코앞에 두고 늦은 결혼을 했고 지금은 아내와 한 명의 자녀와 행복한 삶을 누리는 듯했다. 그는 아직도 그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그는 이제 중년의 고급 간부가 되어있었다. 이제 밑에 들어오는 젊은 신입 직원들이 저지르는 흑역사들을 지켜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고 했다. 그건 자신이 그 시간을 거쳐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고 다 성숙하는 것은 아니다. 성숙은 가만히 시간을 때운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인고과 배움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과거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약 ‘10년 전, 혹은 20년 전으로 돌아가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면 그 자는 현재가 미련과 후회로 가득 차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숙한 자에겐 타임머신이 필요 없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희망하는 건 지금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처는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그 여성이 말했다.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은데… 이제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법을 알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 옆에 있는 상대에게서 받은 과거의 상처와 충격은 지워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상대 앞에서는 성숙한 이성보다 미숙한 과거의 감정들이 계속 먼저 튀어나온다는 것이었다. 트라우마가 되어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다.
“이제 두 번의 결혼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인간이 100세를 사는 시대예요, 반평생을 미성숙한 트라우마에 갇혀 살았잖아요, 국가가 원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요, 이제 비록 육체는 노화되었지만 예전보다 성숙된 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럼 제대로 된 성숙된 사랑을 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어야 하잖아요”
결혼이라는 제도가 인간을 묶어놓고 있는 제약과 구속일까? 결혼이라는 문화와 제도는 분명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제도와 문화를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 제도와 문화가 성숙된 정신을 갖춘 인간들이 깨치는 속도와 함께 변화되지 않는다. 물론 무분별하게 감정에 휩쓸려 결혼과 이혼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자는 분명 정신의 미성숙과 육체의 욕망에만 휘둘려 살아가는 자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책임과 도리를 다 했다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주고 또한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해 줄 수 있는 성숙한 관계로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사랑없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무도 나약하다.
그 여성이 토론에서 했던 말은 수 백 년간 인간의 인식과 정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만든 변하지 않는 결혼 제도에 대해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던져 주었다.
과연 결혼이라는 것이 개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를 위하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국가와 사회를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럼 결론은 이제 국가와 사회는 개인의 인식 변화과 성숙에 따른 제도와 문화의 개선을 필요로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국가와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보다 느리다. 개개인의 변화가 더 많은 목소리를 내고 여론이 되어가면 제도적 문화적 변화가 일어난다. 독서를 하고 모여서 토론을 하는 이 과정이 아마도 그런 변화의 시발점이지 않을까…
“인간은 발길 닿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존재다.”
- 톰 필립스 [인간의 흑역사] 중에서 -
우리가 과거의 흑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더 이상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지금도 우리가 오랜 시간 지키고 가지고 왔던 것이 언젠간 미래의 후손들이 알게 될 가장 긴 인간의 흑역사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가 죽고 나서 재평가를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