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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훈련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박찬국

by 글짓는 목수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며칠 전 도서관에서 몇 명이 모여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낯선 이들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모두 ‘책’이라는 매개체가 있었때문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등한 입장에서 듣고 대화하는 것이 흥미롭다.


‘나이가 몇 살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미혼인지 기혼인지’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그 어떤 선입견과 편견이 없이 상대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너무 흥미롭다. 언제나 일상의 만남과 관계는 서로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나와의 관계는 어떤지 이미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맞는 대화와 행동양식을 요구받게 된다. 이건 우리가 가족과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 속에 속해서 살아가는 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도 같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또한 사회와 기업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국가의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다 해야 한다. 이건 현실 세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짊어지게 되는 숙명과도 같다. 그리고 이런 숙명들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족과 학교와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 역할들을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가진 고유의 생각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무슨 소리예요 갈수록 생각이 많아지는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생각이란 자신이 속한 환경과 역할과 책임이 만들어 준 생각이 아니던가. 아니라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책(주제)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낯선 이들과 대화해 보라. 그럼 자신이 얼마나 좁은 시야에만 갇혀 살아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서론이 길었다.


에리히 프롬 (1900~1980)

궁금했다. 사람들이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정의하는지… 그래서 나는 일부러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집어 들고 모임으로 나갔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을 소개하기 전에 그들에서 질문을 던졌다.


“각자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를 한 문장으로 얘기해 볼까요?”


갑자기 느닷없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느라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사랑은 주고받는 거 아닐까요? 기브엔 테이크(Give & Take)”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그걸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닐까요?”

“사랑은 줘도 아깝지 않은 것 아닐까요?”

“전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해봐서 잘 모르겠어요”


각자 모두 다른 사랑의 정의를 얘기했다. 마지막에 대답하신 한 여성 분은 사랑에 상처를 입은 분이신지 이 질문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자신은 아직 사랑의 개념도 정의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봤다. 그들은 내가 [사랑의 기술]을 읽고 뭔가 사랑에 대한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표정이었다.


“사랑은 훈련이에요”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분명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너무도 간결한 문장이었다. 나는 책 속은 한 구절을 찾아서 그들에게 읽어 주었다.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능력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에게 사랑을 줄 올바른 상대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에 문제로 바라본다”


- 박찬국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우리는 사랑을 찾아 헤맨다. 이곳 독서 모임에 나온 사람 중에도 물론 독서의 명분과 함께 사랑할 사람 만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질우선주의와 외모지상주의 세상에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독서와 토론을 통해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가장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일상적, 경제적, 물질적, 정치적인 현실적인 대화만 나누고 사는 삶 속에서 그것들과 잠시 떨어져서 그것들을 책 속에 담긴 주제를 통해 이성적이고 때론 감성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럼 표면적인 것에만 머물던 우리의 대화가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것으로 변해간다. 우리는 그런 동등한 입장과 상황 속의 대화에서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드려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하나요?”


누군가가 나에게 되물었다.


“그럼 과거에는 사랑이 없었나요?”

“무슨 소리입니까?”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자유연애가 시작된 역사를 이야기했다. 인류는 자유연애를 시작한 지는 기껏해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땐 누군가를 결혼하고 살면서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만 존재했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분명 사랑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분명 사랑은 존재했었다.


과거에 인연은 주어진 것이었고 지금은 인연은 찾는다는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그럼 사랑의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주어진 인연에게서 어떻게 사랑을 찾고 만들어 갈 것이냐의 문제가 과거의 사랑의 접근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먼저 아니던가?


과거 사랑은 전자의 경우처럼 서로 잘 모르던 남녀가 부모 혹은 환경(신분과 소속집단)에 의해 맺어져서 그 안에서 둘이 사랑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는 헤어짐(이혼)이란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면 그 상황에 놓인 남녀는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을 지금 보다는 좀 더 많이 거쳤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 과정이 서로를 내어주고 감싸주는 훈련의 과정이라고 봤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과정을 왜 겪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사랑이 식어서 이혼했다”


이건 사랑을 그저 느낌과 감정의 개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현대사회는 과거와는 달리 수많은 네트워크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고 다양한 관계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만큼 옵션이 많다. 옵션이 많다는 것은 유혹이 많다는 것이기도 한다. 선택지가 많으면 선택도 어렵지만 처음 선택이 실패해도 두 번 세 번의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선택과 선택을 거듭하면서 선택의 유혹에 휩쓸려 다닌다. 당신의 집에 옷장과 신발장을 열어보라. 입지 않는 옷과 신발들이 얼마나 많은지… 배우자와 연인을 선택하는 것이 이와 같지 않은가? 그러면서 항상 입을 옷이 없다는 둥 신을 신발이 없다는 말을 내뱉는다.


“외로워요”


이런 풍요 속에서도 외롭다는 느낌은 항상 받고 산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옆에 상대가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외로움의 다른 의미임을 알지 못한다. 이건 자유를 외부의 선택과 타자에 의존해서 찾는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뭐 이런 심리가 물질문명을 발전시키고 더 많은 관계와 역할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외로움 속에서만 가능함을 모른다. 연인이 있다고 가족이 있다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가? 아니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서로의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런 훈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려 하고 그저 끌리고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존재만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각자의 외로움을 인정하고 서로가 내어주는 과정을 극도로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혼자 있었을 때의 그 자유를 함께 있을 때도 동일하게 느끼고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태극

“파랑과 빨강이 만나면 보라색이 된다”


나는 파랑이고 너는 빨강이다. 그럼 서로가 서로의 공간을 내어주는 태극 모양을 이루어야 한다. 이건 서로가 침투해 가는 과정이다. 만약 서로가 내어주지 않는 반달의 형태로 있다면 어떨까? 이건 서로 대치하고 대립하는 상황이다. 태극은 섞임의 과정이다. 그럼 결과는 무엇인가? 보라색이다. 나와 너는 각자의 색깔을 버리고 새로운 색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반달처럼 계속 반쪽만 찾아다닌다. 마치 반달곰이 숲 속에서 교미할 짝을 찾아다니듯 말이다.(반달곰은 짝짓기 시기에만 함께하고 대부분의 단독 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원앙 같은 연인을 원하면서 반달곰처럼 살아간다. 모순이다.


우리는 항상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아니다. 서로 만나서 인격적으로 성숙되는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성숙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것은 당신이 성숙하지 않기에 타인을 통해 그것을 채우려는 결핍이 만든 욕심이다. 훈련 과정 없이 군인이 될 수 없듯이 함께 하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


반달로 태어나 다른 반쪽을 찾아 태극으로 섞이고 다른 색으로 합일되는 과정이 사랑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새롭게 다른 색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박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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