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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10. 2024

사랑의 뉴노멀(New Normal)

[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 독서 토론에서...

“그럼 그게 시대의 사랑의 뉴노멀(New Normal)이 아닐까요?”

“뉴노멀이요?”

“네,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이 변하잖아요. 사랑하는 방식도 변하는 거죠? 과거 어른들이 하던 사랑의 방식과 지금의 젊은이들이 하는 사랑의 방식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커서 할 사랑의 방식 같을 수가 있나요?”


얼마 전 독서 토론에서 내가 ‘사랑’에 관해 던진 화두에 대해 답변한 한 20대의 젊은 친구의 생각이 나의 상념의 바다에 돌을 던졌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자리에 있던 나의 동년배 혹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 분들은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가져다주는 그 느낌을 갖고 싶기 때문이잖아요”

“음... 그렇죠”

“그것을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좀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신체적인 부작용이 없다면야 그것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은 지금 그곳에 앉아 듣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왔다. 그들이 그렇게 느끼는 건 분명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콕 집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그것을 집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조 [Zoe]

“예전에 본 영화 중에 [Zoe]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영화 속 미래엔 간단한 약물을 통해 호르몬 분비를 통제해서 처음 만난 상대에게서 첫사랑의 감정을 수시로 느낄 수 세상을 보여 주더라고요 그러니까 뇌를 속여서 낯선 상대에게 과거 기억 속의 첫사랑 때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거죠”


독서 토론의 선정도서는 [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라는 뇌과학 관련 도서였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뇌 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다. 그 관심을 반영하듯 시중에도 뇌과학 관련 서적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모두가 뇌를 패턴과 기능을 분석해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반영하는 듯했다. 토론에서 뇌를 통제해서 좀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행복감을 가질 수 있느냐는 주제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독서토론 [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제 많은 이들이 물질적인 조건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독서모임에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행복의 또 다른 요인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서 나온 화두가 바로 관계였다. 그리고 관계 중에서도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랑 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해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사랑은 과정인가 결과인가


남녀 간의 사랑은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사랑의 두 가지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 그 무엇 하나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이 둘의 사랑이 잘 연결되고 융합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통해 궁극적인 행복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젊은 친구의 답변은 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표면적으로 보면 뭐 큰 문제인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사랑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사랑의 본질을 과정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결과에서 찾을 것인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주는 그 느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고 자존감이 급상승한다. 삶에 의욕이 샘솟는다. 사랑은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또한 사랑이 현실을 견디고 살아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은 모순을 품고 있다.


“세상엔 해야 할 일도 너무 많고 관계로 인해 빚어지는 많은 갈등과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잖아요”


맞다. 관계는 필수적이면서 필요악이기도 하다. 인간이 수많은 관계와 역할 속에서 고통받지만 또한 그 속에서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사랑도 관계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지 않은가? 하지만 과거에 우리는 이 사랑을 얻기 위해 관계의 과정과 시간을 견디며 그것을 얻어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고 상처받아 왔다. 이제 젊은이들은 그걸 머리로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관계가 가진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진 양날의 검을.


그리고 과학과 의학이 손을 잡은 뇌과학은 그 고통을 배제한 행복한 느낌만을 추출하는 방법을 연구해 나간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각종 VR기기 혹은 약물이라는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건 멈출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이건 산업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미래 핵심적인 분야가 아니던가? 가상현실과 뇌과학(뇌를 통제)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느낌과 행복과 경험을 수시로 얻을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아마도..


“엄마~ 편지는 왜 쓰는 거야? 왜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는 거야? 왜 남자와 여자가 자꾸 쓸데없이 시간과 돈과 감정을 소모하면서 함께 하려는 거야?"


그 젊은 친구의 생각처럼 가상현실과 뇌와 호르몬 분비를 통제하는 약물이 이미 보편화된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할까? 이건 전화기가 없던 시대를 살던 시대를 살았던 세대가 스마트 폰이 생활필수품이 된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답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진짜 그때가 좋았었는데 말이야… 글치”


얼마 전 한국에 돌아와서 오랜만에 어린 시절 친구들을 만나서 저녁을 먹으며 추억의 시간을 가졌다. 다른 지인들은 모르지만 어린 시절 꼬치친구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도 할 얘기가 많고 어색함이나 거부감이 없다. 서로 각자 다른 직업과 환경 그리고 생각을 지녔지만 함께하는 게 즐겁다. 그건 무엇 때문인가? 이건 어린 시절 함께한 오랜 시간 속에서 느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만든 기억들 때문 아니던가? 하지만 나이가 들고 사회에 나가서는 그때처럼 목적과 이유 없이 함께하는 시간은 점차 사라진다. 이제 만나는 사람은 머리로 빨리 이해하려는 사람들 밖에 없다. 시간과 노력을 아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있을지언정 공감은 없다.  


기억은 과정(시간)감정이다.


우리가 옛날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바로 함께한 시간과 그 순간순간 가졌던 감정들이 만들어낸 기억 때문이다. 신속함과 효율성은 기억할 감정과 시간을 허락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이 신속과 효율에 취해갈수록 냉혹해지고 차가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가 사회에 나와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모두 이해(利害; 손익관계)로 변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목적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만나고 관계를 가진다.


독서 모임에서 그 MZ청년의 말은 마치 인간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감정적인 소모와 충격을 배제하고 관계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이득이 있더라도 과도한 정신적 감정적 소모와 충격이 동반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것을 포기해 버린다.  원하는 것만 얻고 싶고 원하지 않는 것은 철저히 차단하려는 것이다. 이건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뇌는 감정이 섞인, 즉 편도체를 자극하는 기억들을 해마에 저장한다. 감정적인 자극이나 충격이 없는 기억들은 쉽게 증발해 버린다. 두려운 공포와 가슴 아픈 상처 그리고 가슴을 울리는 감동과 설레고 두근거리는 기쁨의 감정들만이 편도체를 자극한다. 편도체를 자극한 기억만이 해마(장기기억)로 저장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황홀했던 극적인 사랑이 떠나가면 소스라치는 슬픔이 밀려오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시간의 격차를 두고 나타나며 이 간극이 큰 기억일수록 더 오래 기억된다. 그리고 해마 속 기억들은 그 어떤 단서나 실마리가 주어지면 그때마다 상기되어 그때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맞아요, 그 시대에 태어난 아이는 이렇게 시간의 경과(과정)를 견디면서 관계가 품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없이 가상현실과 약물을 통해 그것들을 경험하겠죠, 그런 가상현실과 약물을 통한 호르몬 분비의 변화는 그저 전두엽만 자극할 뿐이에요. 그럼 그들이 나중에 늙고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그들의 해마 속에는 아무런 기억이 없지 않을까요? 추억하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린 거죠, 죽는 순간 돌이켜 보니 사랑했던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물론 그런 생각 차제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가상현실 체험과 약물을 한 번이라도 더 복용하면서 그렇게 죽을 것이기에… 그게 노멀이 되어버린 세상이니까? 만약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뉴노멀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향해 가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전두엽 속 사랑 vs 해마 속 사랑

“성적인 사랑을 할 때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성적인 사랑이 아닐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미지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우리는 성적인 사랑이 주는 그 느낌을 아무런 노력과 시간의 경과 없이 느끼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에는 매춘과 향락 그리고 유흥이 없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선하고 밝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언제나 음지에서 활기 친다. 그리고 그 행위는 언제나 타인의 육체와 감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젠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그런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없이도 자유롭게 그 이미지와 느낌을 리얼하게 전두엽에 전달해 줄 것이다. 그 어떤 육체적 부작용 없이 말이다.


"그것이 뉴노멀의 시대라면… 우리는 그 뉴노멀을 다음 세대에게 안겨 주어야 할 것인가?"


과거 첫사랑을 매일 집에다 데려다주었다. 오랜 시간 함께 걷고 대화하며 수많은 감정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집 앞에서 그녀와 손을 잡고 입맞춤을 했던 기억을 몇 날 며칠 동안 떠올리고 또 떠올리며 잠 못 이루었다.


그때 손을 잡고 입맞춤하는 2~3초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그 짧은 순간을 수십 번 수백 번 되감기 하며 그 기억은 수십 시간 수백 시간으로 연장되었다. 그리고 영원해졌다. 그렇기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떠올릴(이미징)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사랑은 비효율적이다.


그건 우리가 사랑을 느낌(결과물)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던가. 그 느낌만 쏙 빼서 당장 느끼고 싶을 뿐이다.

사랑은 순간의 느낌(결과)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추억(과정)이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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