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랑이 사랑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믿음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 박찬국 [에리히 프롬_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이 문장을 읽고 내면의 마음에 요동침을 느끼는 자는 사랑에 대한 간절함을 가진 자일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이 가슴에 와닿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과 믿음이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사랑을 하려니 믿음이 없고 믿음 없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던가? 세상이 온통 가식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배신이 되고 믿음이 불신이 되는 경험들로 인해 더 이상 사랑이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믿음이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경험에서 멀어져 간다.
그렇기에 사랑하기보다는 증오하지 않기, 불신을 만들기보다는 믿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이리라.
호주에서의 적잖은 시간을 책을 읽으며 철학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계기가 바로 박찬국 교수의 책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연히 접하게 된 그의 책[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서평참조)를 시작으로 그의 가독성 높은 문체와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 나를 철학의 세계로 끌어들였던 것 같다. 이후 그의 책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서평참조),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서평참조)를 이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이후 다른 철학 해설서들까지 찾아보면서 서양 철학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뭐든 첫 인연의 아름다운 기억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법이다.
한국에 온 이후 도서관 산책 중에 우연히 책장에서 발견한 그의 최근 책이었다. 얇고 가벼운 형태로 출판되었다. 또 계획에 없던 독서였다. 가방 속에 있던 책은 또 뒷전이 되어버렸다. 그 자리에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역시 믿고 보는 작가의 책은 언제나 후회가 없다. 독서를 오래 하다 보면 이제 믿고 보는 작가가 생기게 된다. 난 이제 서양 철학 하면 박찬국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니체, 쇼펜하우어 그리고 에리히 프롬 전문가 같다. 앞에 둘의 철학자도 매력적이지만 프롬은 그들과는 결이 다른 철학자이다. 좀 더 마음이 간다. 누군가는 해설서가 아닌 원서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읽히지 않는 원서를 억지로 읽는 것보다 해설서로 관심과 저변 지식을 이해하고 원서를 접하면 더 잘 읽히게 된다. 읽히지 않는 건 잃지 않은 것과 다를 게 없다.
에리히 프롬 (1900~1980)
'사랑에 관한 철학'에선 에리히 프롬을 빼놓을 수 없다. 사랑의 전도사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사랑’의 정의를 바꾸어 준 인물이다. 나 또한 그의 책을 읽고 기존의 사랑에 대한 관념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
- 박찬국 [에리히 프롬_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서두에 문장과 연결되는 구절이다. 사랑은 용기에서 시작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건 누구나 동의하는 말일 것이다. 만약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음… 좀 더 기초적인 단계로 내려가서 사랑을 배워야 할 듯하다. 이 말에 동의하시는 자만 계속 읽어내려가길 바란다. 왜냐 이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내가 뒤에 할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용기이다. 물론 용기와 믿음은 정확히 선후를 구분하기 힘들지만 상대가 나에게 가져다준 직관적인 느낌과 통찰에 전적으로 의존했다면 용기로 다가간 것이고 어느 정도 상대와의 시간과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생긴 감정이라면 믿음일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이든 간에 우리는 둘 다 거쳐야 할 과정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이제 사랑이라는 감정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부터 나의 직관과 통찰 그리고 관찰이 시험에 들게 된다. 우리는 직관과 통찰 그리고 관찰로 상대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이것이 만약 상대가 의도적 혹은 사회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 혹은 페르소나(인격) 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대통령이 정치를 너무 잘해, 근데 집안은 개차반이예요, 그럼 그 사람은 개차반인가요 아님 훌륭한 사람인가요?”
얼마 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튀어나온 말이었다. 국민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의 개인 사생활이 개판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물론 그것이 법적, 윤리도덕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범위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은 분명 다른 서로 다른 것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역할은 상호보완적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상충하는 관계로 변질된다. 이것을 시간(선택)과 노력(집중)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어디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에 다른 결과와 평가가 갈리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페르소나
두 개의 페르소나(역할)
사회적 역할과 인간적 역할은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강요받는 세상 속을 살아간다. 사회와 국가와 조직은 논리와 이성 그리고 효율과 성과를 지향하고 추구하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다른 반쪽 공간은 그것과는 동떨어진 배려와 감성 그리고 사랑과 믿음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곳이다. 과거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전자의 시공간에서 살아왔다. 그 말은 우리가 좀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또한 효율적이고 성과지향적으로 변해 왔음을 의미한다. 그건 상대적으로 후자의 가치들이 소외되고 홀대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하고 개인의 가치관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 바야흐로 개인주의(국수주의, 가족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국가와 사회는 개인 구성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간과했다. 개인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과 가치관으로 변해 갔기에 국가와 사회 또한 그렇게 변해 왔던 것이다.
나 또한 과거 직장 생활을 할 때는 24시간 중에서 잠자는 시간과 휴일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그 조직과 그와 관련된 관계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깨어있는 삶을 한 판의 피자라고 본다면 피자의 3/4 이상이 개인이 아닌 구성원(부품)으로서의 삶을 강요받은 것이다. 사람들의 뇌가 논리와 이성 그리고 효율과 성과의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으이그, 저 돈 안 되는 인간 언제 철 들려나 몰라”
과거 자주 내 입으로 내뱉었던 기억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이 돈을 번다는 개념으로 정착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철’은 분명 ‘돈’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당연하게 내뱉는다. 모순이다. 여기서 말하는 ‘철’은 한자로는 쇠(철, 鐵) 자를 의미하지만 이건 성숙되어 단단해짐의 은유적 표현이다. 돈이라는 쇠(전, 錢)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이건 우리는 결국 대외적,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상대의 페르소나에 빠져 사랑을 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인이 되고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만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성인이 되면 반려자와 동반자를 찾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상대를 처음 보고 듣고 느끼는 모습은 상대의 또 다른 페르소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걸 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면 연예인들이 서로의 만들어진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이 오랜 시간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고 삶의 동반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페르소나를 서로 사랑했지만 실제 그 이면의 페르소나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건 그들이 대외적인 이미지와 명성을 먹고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그 사회적 이미지와 개인 고유의 이미지의 괴리가 일반인들보다는 더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명 연예인들의 러브 스캔들은 대부분 좋지 않은 파국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개인들과 집단들 속에 존재하는 추악함과 사악함에 눈을 감고 인간의 풍요로운 가능성만 믿는 ‘순진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박찬국 [에리히 프롬_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랑이 증오로 변하고 믿음이 불신이 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사회적 대외적 역할에 가려진 상대에게서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대가 가진 페르소나의 간극을 받아들일 포용과 용서를 가지진 않았다. 사랑이 최종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목적지인 용서와 포용은 인간에게는 너무도 가혹하고 견디기 힘은 과정이다. 이건 과거 예수가 걸어갔던 길이다. 누가 그토록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걷고 싶은가?
비둘기처럼 순결함과 뱀과 같이 지혜로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 [마태복음] 10:16 -
이건 우리가 지혜롭게 사랑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혜의 눈을 가지게 된 자는 상대를 바로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지혜가 없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사랑이 미움이 되고 믿음이 불신이 되는 경험을 반복하며 그것들이 트라우마와 상처가 되어 더 이상 사랑과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그렇게 변해버렸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예수가 가르쳤던 ‘단순(결)한 자’에 대해 ‘그는 속이지 않지만 속지도 않는 자’라고 말했다.”
- 박찬국 [에리히 프롬_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우리가 제대로 된 사랑을 하려면 ‘속이지 않고 속지도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지혜롭게 사랑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