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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3 단계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읽기] 박찬국 - 세번째 -

by 글짓는 목수

“사랑은 모성애에서 시작해 이성애를 통해 인류애로 나아간다”

- 글짓는 목수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을 읽고 난 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 가지 단어는 모성애와 이성애 그리고 인류애였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을 통해 이것을 설명하려 하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온전하고 완전한 모성애와 이성애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류애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세상에 사랑은 온기는 점점 식어가는 것이다. 프롬은 우리가 그런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 과정을 통해 결핍된 사랑을 극복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복음) 13:34 -


사랑만이 인류가 직면한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에리히 프롬 (1900~1980)


사랑의 시작, 모성애(母性愛)


“우애애애앵~~~”


엄마의 뱃속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아기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댄다. 모체와 분리되어 세상을 맞닥뜨린 아기의 최초 반응은 두려움과 공포이다. 그래서 운다. 그리고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기면 아기는 익숙한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듣고 다시 안정을 찾는다.

모성애

아기는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아기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지해서 세상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엄마가 바로 세상인 것이다. 엄마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유아기 때 형성된 무의식의 세계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평생 동안 우리의 잠재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모성애가 중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어머니도 불완전한 한 인간이고 그 어머니 또한 유아기 시절 받았던 모성애가 완전하지 않다. 이 불완전한 모성애가 아이가 세상을 불완전하게 받아들이는 시작이 된다.


자기가 낳은 아이에 대한 모성애가 없는 여자는 없다. 물론 극히 일부 그릇된 정신세계가 구축된 여성들이 있을 수 있다. 이건 심각한 질병이다. 사랑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의 아이에 대한 강한 모성애를 가진다. 이건 연약하고 무해하며 순수한 존재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아가페)이다. 문제는 이 사랑의 표현 방식이 각양각색이다. 마음은 모두 하나인데 그 사랑의 표현이 가져오는 결과는 상이하다.


어머니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아이를 돌본다. 그 과정에 어머니는 많은 희생을 감수한다. 남편을 통제해 자녀에게 더 많은 물질적, 환경적인 환경을 얻어내려 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아 부부간에 불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부부는 아기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개인의 행복을 반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과거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키워온 방식이었다. 자녀는 물질의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는 존재이다. 어린아이가 명품 유아복과 시장에서 사 온 몇 천 원짜리 유아복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는 더 좋은 브랜드의 옷과 좀 더 좋은 유모차와 좀 더 좋은 이유식과 환경들을 제공하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 아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다. 아이를 위해 더 많은 것과 더 좋은 것을 제공하려는 부모의 노력 속에서 부부는 서로에게 또한 자신에게 냉정해지고 소원해진다. 부부가 아이가 양육하면서부터 불화가 잦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아이는 기쁨인 동시에 고통의 원천이 된다. 양육이 보람되지만 고통스러운 이유다. 모순이다.


“애 생기면 돈 들어갈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아이가 생겨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다. 아이들 한 명이 탄생함으로써 생기는 경제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아이 한 명이 성인(18세)이 될 때까지 소요되는 비용은 3.6억 정도라고 한다. 이건 세계에서 최상위의 수준이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는 자녀출산을 그토록 강조하고 권장할 수밖에 없다. 또한 아이의 출생이 평범하던 두 남녀가 가난으로 빠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부모가 자녀를 낳는 순간부터 소비의 주체는 어머니이고 소비의 대상은 아이가 된다. 그리고 이 소비는 가성비보다는 성비만을 보는 비정상적인 소비 패턴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서 벗어난 특이한 소비행태이다. 이건 인간의 본성 중 모성애를 자극하는 소비전략이다. 모성애는 논리와 이성 그리고 효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코 묻은 돈”을 무시할 수 없다. 아이들 장난감과 아동용품들이 왜 그리 비싼지는 그것과 관련이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린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누리는 자들이야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에게 그것은 적잖은 경제적인 부담의 요인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기에 부모는 더 많은 경제활동을 요구받고 그것이 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게 된다. 부모가 되는 순간 나와 너의 꿈은 사라지고 그 꿈이 아이에게 투영되고 전가되는 이유이다. 아이가 꿈이 되어버린 부부의 삶은 마치 불타는 석탄과도 같다. 자신을 태워서 아이를 꿈에 나라로 보내야 하는 사명을 가진다. 아이는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라난다. 그리고 아이의 눈과 귀와 피부로 느껴지는 그 모든 부모의 말과 행동들은 아이의 무의식에 저장된다.


좋은 엄마 vs 행복한 엄마


우리는 대부분 좋은 엄마가 되려고 한다. 좋다는 것은 나쁜 것이 있어야 한다. 비교 우위의 판단이다. 그 비교 판단의 기준이 다른 엄마가 아이에게 해주는 물질적 환경적인 지원이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선 다른 아이들보다 더 나은 물질적인 풍족과 환경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다. 자본주의 세상은 언제나 이런 비교하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서 소비를 부추기고 그 소비를 위해 더 많은 소득을 요구받는다. 더 많은 시간 일과 노동에 할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득은 당장 필요하기에 노동과 소득이 바로 연결되는 일만 쫓게 된다. 그러는 사이 부모는 사회의 발전에서 조금씩 도태되고 소외되어 간다. 그 상실을 아이의 미래에서 찾으려 한다. 아이가 미래의 희망처럼 되어버린다. 이것이 과거 부모들의 모습이었고 지금 부모도 그것을 답습하고 대물림 하며 그것이 대물림 되는 사회를 계속 유지하려 한다.

좋은 엄마 vs 행복한 엄마

아이는 부모의 사랑이 아닌 부모의 돈이 키운다는 말이 나온 건 이 때문 아니던가.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서로 대화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다. 같이 있으면 항상 심각한 표정과 대화 그리고 서로 화만 내는 모습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 어두운 표정과 날카로운 대화의 느낌만을 머릿속에 간직한다. 설사 그들이 아이 앞에선 웃고 밝은 척을 하지만 그것이 모두 가려질 수 없다. 아이는 영적인 존재이다. 가린다고 모르지 않는다. 그 기운을 모두 느끼고 있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만 하는 노력이 나쁜 아이를 만들고 있다는 걸 모른다.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야만 아이가 그것을 보고 느끼며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물론 여기서 아이의 안전과 신체적 성장과 보호까지 내팽개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건 아이를 방치하는 것이다. 자신이 행복하면 그 행복은 아이에게 전염되게 되어있다. 모성애는 아이를 사랑으로 분리시키는 과정이지 아이를 사랑 안에 가둬놓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고픈데 현실이 이상하다?! 그래서 포기 – 이성애


어린 시절 받았던 모성애는 성인이 커가면서 이성애의 판단 기준이 된다. 모성애가 삐뚤어지면 이성애 또한 삐뚤어질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지금 청년들이 사랑을 하지 않는 이유 중에는 이 잘못된 모성애가 적잖은 공헌을 했을 것이다. 물질로 채워진 모성애를 경험한 아이는 커서도 자신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 줄 상대를 찾게 된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남자는 어린 시절 모체에서 느꼈던 그 첫 여성의 따뜻함과 살냄새를 위해 물질과 환경을 제공하고 여자는 물질과 환경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의 과정이고 그 결과가 결혼이며 그것의 결실이 출산이다. 이 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며 돌아간다. 경제도 그렇게 계속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 이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성애

이건 어쩌면 인간이 이제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존의 사랑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사랑이 계속 현실적 불행으로 이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해 의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이 산업사회에선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걸 관심을 가지고 알아볼 여유도 없다. 경제도 바쁘게 돌아가야 하고 삶도 그것에 발맞춰 바쁘게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런 분주한 삶 속에서 많은 것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이제 과거처럼 조건 맞춰서 상대를 찾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전형적인 사랑의 쳇바퀴가 고장 난 듯 보인다. 문제는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도 현실의 사회 제도(시스템)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적용하지 못한다. 그건 지금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들어야 할 대상과 현재 시스템과 제도를 만드는 사람 간의 세대 차이의 괴리가 만들어 낸다. 그 제도와 시스템은 기성세대가 만들고 결혼과 출산은 청년 세대의 몫이다. 제도를 만드는 주체와 적용되는 대상이 분리되었다. 서로가 소통하고 이해가 원활하다면 이것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불통사회이다. 기성세대는 과거의 생각과 관념에 머물며 현재 세상의 시스템을 만든다. 세대 갈등이다.


지금은 청년 세대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이다. 과거 부모세대처럼 사랑하는 것은 이제 뭔가 아닌 것 같지만 현실의 시스템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만들어져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커져버렸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은 나의 불행을 아이가 가져간다는 이치를 깨달았는데 기성세대는 아직도 그것이 자녀를 위한 희생이며 당연한 것이라 가르친다. 희생이 행복과 대치되는 개념처럼 만들어 놓았다. 왜 희생이면서 행복일 순 없는가에 대한 생각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 타인에게도 당연하다는 생각은 옳은 것인가?


인류애는 멀기만...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한창이다. 사랑이 사라지면 벌어지는 일들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는 다른 것이 채워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마음은 진공상태를 견딜 수 없다. 사랑이 떠난 자리는 미움이 자리 잡는다.


나는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분명 모성애부터 잘못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는 훈련의 시간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기심과 욕망으로 그 결핍된 사랑을 채우려는 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위험천만하다. 타인을 자신의 그것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올바로 된 이성애를 경험하지 못하고 이성 또한 자신의 사회적 지위 혹은 욕망을 채우는 도구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뭐 누군가는 결핍된 모성애로 인해 이성에 대한 강한 집착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통해 타인으로 나아가는 인류애로 향해야 한다. 집착의 사랑은 그 상대를 자신에게 묶어두고 종속시키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애 - 예수의 사랑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기술]을 통해 모체에서 분리되어 시작되는 모성애부터 시작해 이성애 그리고 인류애로 연결되는 사랑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의 기술] 책을 집필한 이유는 그 또한 모성애의 결핍을 겪고 집착과 그릇된 사랑만을 해왔고 인간은 노력과 훈련을 통해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성애의 결핍을 상호 보완적인 이성애를 통해 극복했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그 사랑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려는 인류애를 실천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랑을 받고 태어나고 자라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모두 결핍된 사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이런 결핍된 사랑을 훈련과 관계를 통해서 극복하고 바로선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랑은 모성애에서 시작해 이성애를 통해 인류애로 나아간다. 그리고 인간은 그 과정을 통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읽기] 박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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