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 양귀자 [모순] 중에서 –
사랑이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건 더 나은 나를 보여주려는 노력 때문이다. 그 계기가 타인의 존재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다른 사랑과 남녀 간의 사랑의 차이점이며 누구나 이런 사랑을 꿈꾼다. 삶에서 사랑이 빠질 수 없는 것은 우리는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 성장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아주 비상식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세상(현실)이 나아가는 방식과 상반된다. 그래서 현실의 사랑은 모순적이 될 수밖에 없다.
드디어 [모순]을 완독 했다. 작가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을 아주 철저히 실천하며 읽은 소설이었다. 내 생애 이렇게 천천히 읽은 소설은 처음이었다. 다 읽은 책 속에는 색연필의 밑줄과 볼펜의 메모로 가득하다. 작가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고 독자도 그러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작가와 똑같이 방식으로 느끼길 바랐을 것이다. 비록 느낌은 서로 다를지라도. 마지막 작가 노트에서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있더라. 양귀자 작가는 깊음 몰입 상태에서 이 소설을 휘몰아치듯이 써나갔을 것이다.
왠지 설명하긴 어렵지만 재작년부터 [모순]에 알 수 없는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내가 쓴 글들을 꾸준히 읽어오신 독자 분들은 아시리라. 유독 ‘모순’이라는 단어를 즐겨 썼다. 해를 넘어가면서 해마다 내가 꽂히는 키워드가 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알 수 없는 모순의 늪에 빠져버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쓸수록 이 단어가 자주 떠올랐다.
“모순이란 자연의 전형적인 법칙이다. 모든 진리는 모순의 형태를 띠고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중에서 –
내가 글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던 시기의 나의 키워드는 ‘불안’이었다. 삶에 대한 불안이 글을 쓰게 한 계기였고 원동력이었다. 계획적이고 반복적으로 돌아가던 분주한 일상이 무너졌다. 퇴사와 함께 찾아든 삶의 불안을 책 읽기와 글쓰기로 드려다 보기 시작했다. 불안이 생겨난 곳이 어디인지 파헤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성과 감성 사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글 속에는 이성과 감성에 관한 글이 상당히 많다. 단어의 형태와 표현만 바뀌었을 많은 글이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사건들과 상상 속 허구들의 서사와 묘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사이에서’의 연재 칼럼은 그렇게 탄생했고 이제 엄청난 양의 원고가 쌓였다. 두 가지의 상반되는 가치와 키워드가 만들어낸 상념의 시작은 모두 ‘이성과 감성’이었다.
이성과 감성 사이 – 모순 속
삶을 온전하게 유지하려면 이성과 감성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작년부터였다. 물론 아직도 이 깨달음은 유연하고 말랑말랑하다. 맹세코 확정하지 않는다. 그건 나의 영역이 아니다.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확정 짓는 순간부터 변화와 성장은 멈춰 버림을 알고 있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삶 속에서 과거 나의 삶을 돌아봤다. 과거의 삶은 이성과 감성 사이의 수많은 고민에서 비롯되었더라.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마다 떠오르는 그 둘 사이의 선택의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성과 감성은 서로를 배척하면서 또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모순적인 관계지만 그 모순 속에서 살아왔더라.
이성에 치우친 삶
과거의 삶은 대부분의 선택이 이성에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일까? 적잖은 시간을 그것을 고민하고 생각했다. 답을 찾았다. 그건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상이 그것을 요구하고 그런 삶이 올바르며 사회와 국가와 공동체에 이롭다는 것이었다. 맞다. 이성적인 삶이 인간 세상을 질서 있고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교육과 훈련의 과정이 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과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것들이더라. 그리고 이런 이성적 합리적인 생각과 행동은 물질문명의 발전과 정신(지식) 문명의 고도화를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가는 지름길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그 발전의 역사를 설명한다. 웃긴 건 기적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임에도 ‘기적’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면 이것 또한 모순이다.
이성과 합리의 실현 – 법
법으로 흥한 자가 법으로 망해가고 있는 모습이 연일 언론과 뉴스에 떠들썩하다. 법조인이 대통령이 되어 법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더니 결국 법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모순이다. 법은 질서유지를 위한 것이다. 법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복잡 다양성이 만연할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에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 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법이 최우선 되는 순간 인간은 그것에 속박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게 드러났다.
법은 최소한이다.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걸 바르게 고쳐 쓰면 ‘법을 아는 인간만이 법 앞에 평등할 수 있다’이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법을 잘 모른다. 그 많은 법조문과 읽어도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법조문의 해석은 그것들을 다루는 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우리가 이유 없이 법조인(그들의 인성이나 가치관과는 상관없이)들을 우러러보는 이유는 이 때문 아니던가. 세상 모든 일들을 법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그 세상은 이미 무법천지 혹은 인간성이 멸종된 세상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면 법은 더욱더 치밀해지고 법이 치밀해질수록 인간도 같이 치밀하게 변해간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치밀한 세상으로 향해간다. 악순환이다. 결국 법으로 밖에 통제가 안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인본이 무너지면 벌어지는 현상이다.
“얼마면 될까요? 형량은 얼마로?”
돈과 시간으로 모든 것을 대체해 버린다. 돈이 있으면 돈으로 돈이 없는 자는 시간으로 대신한다. 배려와 양보 그리고 사과와 용서는 필요 없다.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왜냐 법은 배려와 양보 그리고 사과와 용서라는 비정량적인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법의 판결은 그것들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정량화된 대가로 결정하는 일을 할 뿐이다. 벌금(돈)과 형량(시간)으로만 설명한다.
세상이 왜 냉혹해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누군가의 감정을 훼손하고 신체에 상해를 가하고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심어 줬다면 판사(당사자가 아닌 개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돈과 시간으로 갚아 주면 그만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던가. 감정을 훼손당하고 상해를 당하고 트라우마를 받는 자가 아닌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 돈만 주면 나의 죄도 뒤집어써줄 사람의 시간(형량)까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감성이 사라지면…
나도 그랬다. 일단 돈을 벌고 지위를 얻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추상적 노동에 임했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이 추상적 노동의 폐해를 지적했다. 인간 노동의 목적이 돈과 지위를 향하게 되는 순간 노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의 부와 명예를 위한 행위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자는 철저히 타인에게 종속된 자이다. 정확히는 타인의 노동력에 종속된다. 그렇기에 타인을 돈으로 유혹하고 그것이 안되면 권력으로 강요하고 억압한다. 돈(명예)이 안되면 물리적 힘으로 상대의 시간(구속, 감금)을 앗아갈 수 있는 힘이다. 사회에서는 대부분 이해관계로 인연을 맺는다. 그래서 친구가 되기 힘들다. 이해관계는 어린 시절 아무 이유 없이 함께 있던 것이 즐거웠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인간성의 말살이 감성을 오랜 시간 무시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남들 앞에서 울거나 슬퍼하는 약한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내지 못하며 반평생을 살아온 것은 다 이 때문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남성도 감성을 가진 동물이다.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것을 관대하게 바라보지 않는 세상에서 너무 오랜 시간 익숙해진 탓에 그런 감성을 대면하면 어색하고 거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어떻게 겸손과 인내라는 두 단어로 미화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더라. 왜 감성의 표현이 겸손과 인내와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문학은 감성이다.
최근 독서 토론에 나가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남성들은 문학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학 관련 토론이면 남성의 참여는 아주 미비한 수준이더라. 한국에서 문학은 거의 여성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렸다. 도서관에 가도 문학을 읽는 남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사회 경제 과학 관련 도서의 토론은 남성들의 참여도가 높다. 한국에 문학인의 비중이 여성이 더 많은 것도 그 이유일 때문일 것이다.
남자가 문학적이고 감성적이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 대한민국이다. 아니 ‘이었다’고 해야 논란의 여지가 없겠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 시기를 살았다. 문학은 비효율의 영역이다. 문학을 읽는다고 삶에 당장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실용서는 보고 나면 바로 삶에 적용가능 한 것들을 써놓은 것이다.
과거 남성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바꾸는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남성의 삶의 영역은 이성과 합리와 효율의 영역에 집중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다시 말하면 과거 물질문명의 발전이 모두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과 금융과 과학기술의 영역에 특화된 남성들이 일궈낸 발전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감성의 영역은 홀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세기의 국가와 사회의 발전은 전적으로 이것들에 의존해서 이뤄졌다.
21세기의 패러다임의 전환
하지만 이제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20세기의 인류 발전 방식이 낳은 폐해가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폐해는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감돌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감성의 영역을 드려다 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감성의 영역은 마치 보이지 않는 양자의 세계와도 같다. 예측하기 어렵고 분석하고 패턴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가진 무궁한 가능성을 인류는 확인했다. 언어(글과 말)적으로 혹은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건 감성과 무의식 그리고 미지와 불확실의 영역이다. 명확히 정의하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그 가능성과 영향력이 크다.
사랑의 힘 (The power of Love) = 모순의 힘
이건 사랑의 힘(The power of love)과도 같다. 사랑하면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효율과 속도를 따지지 않으며 아주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 되지만 그 안에 엄청난 힘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 에너지는 행복감을 수반한다 것을 알 것이다. 사랑은 20세기가 서서히 멸종시켜 간 가치 중 하나가 아닐까? 요즘은 사랑하는 청년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사랑할 여유가 없다. 사랑이 사치가 된 세상이다. 왤까? 사랑은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선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 아니던가. 사랑이 모순적인 두 가지의 힘을 가지고 있다. 삶의 의미와 위협이라는 두 가지 말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가 필요하지만 위협은 회피하며 살아야 하는 모순을 산다. 하필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인류의 발전은 물질문명 발전의 최대 가속기였다. 사랑의 감성은 물질의 이성에 철저히 희생되었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그리고 세계 각지의 국지전들은 모두 물질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민족과 국가의 욕망이 일으킨 살육이 아니던가. 경쟁적으로 경제 발전과 물질문명의 발전을 위해 온 국민이 힘써야 할 이유가 되었다. 타국에 의해 짓밟히지 않으려면 이것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삶의 의미보다는 삶의 위협을 없애는 것이 우선시되었다. 긍정적인 것을 쫓기보다 부정적인 것을 없애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만 보게 된다. 우리가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이유다. 한국의 역사는 생존의 절박함의 연속이었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이념 분쟁과 살육 전쟁으로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그것이 물질문명 발전의 간절함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물질문명이 빈약한 나라가 절대 자주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약육강식의 글로벌 생태계에서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다.
감성이라는 화폐
21세기는 기존의 물질문명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보이는 세계이긴 한데 만질 수 없는 세계를 창조했다. 온라인이라는 신세계가 인류의 새로운 생활공간이 되었다. 예전에는 생활공간의 개념은 주거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음은 모두가 인정하리라. 이제 주거 공간은 데스크 테리어로도 충분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의 세계에서 머무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건 비단 스마트 폰을 보고 컴퓨터 서버 속 공간에만 머무는 시간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색하는 모든 비물질적 활동을 포함한다. 이것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물질적인 부가가치의 창출보다 생각의 부가가치, 즉 공감과 아이디어 혹은 남다른 생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생각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사물(상품)과 지식은 넘쳐나는 세상이 도래했고 인간에게 좀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거 사물과 지식이 주던 물질적 부유와 정신적 부유은 이제 그 가치가 퇴색되고 있다. 물질은 편의와 속도 미묘한 차이를 통해서만 가격이 매겨질 뿐이고 정신(지적인) 부유함은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다 거기서 거기뿐인 이야기가 되었다. 단순한 지식습득은 이제 앎이 아니게 되었다.
사물은 생각의 구현
알다시피 사물은 생각이 현실에 구현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위대한 것은 생각을 현실의 사물로 구현해 낸 것 때문 아니던가. 이건 발상의 획기적인 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감성의 기술적 접목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하지만 뭘 원하는지 모르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구현하려는 시도가 성공한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한번 지구와 인류의 공존을 위해서 필요한 감성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은 다 있다. 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지식과 사물들 속에서 찾아내어 연결하고 융합시켜야 한다고 본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없다. 기존에 있었지만 알지 못했고 관심을 가지지 않은 무언가가 서로 연결되고 융합될 때 새로운 발상이 생겨나고 그 발상이 현실의 기술과 접목될 때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 사물과 현상이 인류의 인식과 생활의 커다란 변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 시도는 언제나 다른 폐해를 낳아왔다는 점에서 과연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없다. 가봐야 안다)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 (=양자법칙의 현실 적용)
양자 컴퓨터는 기존의 고전 컴퓨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을 자랑한다. 이건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고 완전히 다른 발상과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질서와 패턴이 아닌 완전히 다른 질서와 패턴이다. 쉽지 않은 도전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도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랜 시간 우리의 뇌를 지배한 프레임에서는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건 엄청난 양의 정보가 뒤죽박죽 섞여있는 우리의 해마 속 무질서와 무의식의 기억 속에서 발견되는 무언가 와도 같다. 이건 기존의 이성과 논리와 합리의 상식에선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깊은 몰입 속에서 과거 감성을 자극(편도체)했던 기억(해마 속)을 끄집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이다. 과거 위대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사색과 몰입의 시간을 중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감성(감각, 느낌, 통찰, 직관)을 통해 사색과 몰입으로 들어가고 그것들을 전두엽으로 끄집어내어 이성(언어적, 수학적, 구성적)적인 형태로 현실에서 표현해 내어야 한다.
이제 이것만이 인간이 AI와 로봇과 구별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되지 않을까? 구별되지 않으면 AI와 로봇에 의해 소외되고 불필요한 잉여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국가로부터 기본 소득을 받으며 연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슬픈 SF영화 속 영화처럼…
인간 소외 없는 발전이란…
결국 쓰다 보니 인류가 원하는 발전은 방향이 모두 인간 소외를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모순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의 발전은 감성이 주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배부르지 않고 비효율적인데 건강한 것 같고 뭔가 긍정 충만한 상태에 놓이게 할 수 있는 그런 발전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양자의 세계)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것들을 인간의 감성(본성) 영역과 어떻게 연결하고 긍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였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 양귀자 [모순] 중에서 -
[모순]을 쓴 양귀자는 삶의 모순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삶이 모순인 것처럼 우주도 모순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와 인류는 오랜 시간 한쪽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고 또한 지금의 결과를 우려하며 걱정하고 있다.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은 어쩌면 이제부터 그 반대의 영역을 들여다 보고 그것에 집중해서 삶과 우주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과거의 답습과 되물림을 끊어내는 것은 익숙한 것들로부터 잠시 떨어지는 용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익숙하진 않은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이다.
안진진이 어머니가 살아온 익숙한 삶을 거부하고 다른 삶을 선택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