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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이 겹치는 사랑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박찬국

by 글짓는 목수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하나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 박찬국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중에서 –


너와 나는 절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 우리는 동일한 공간과 시간을 점유할 수 없다. 불가능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라는 육체는 질량을 가진 존재이고 질량은 부피를 가진다. 부피는 공간을 점유한다. 나와 너는 별개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시간은 같지 않냐고 말한다면 그것도 미시적인 물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아니다. 완전히 동일한 공간에 위치하지 않는다면 너와 나는 절대 같은 시공간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너와 나는 하나 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 구획되어 있다”


- 박찬국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중에서 -


세상에 모든 질량을 가진 존재는 자신만의 시공간을 점유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생명을 지닌 질량은 그 시공간을 조금씩 넓혀가며 또한 그 시공간을 지키기 위해 부단이도 분투하며 살아간다. 물리학에서 가장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건 같은 질량과 구조(원자조합의 동일=같은 분자구조)를 가진 존재가 생명을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이라는 다른 학문이 별도로 존재한다.


하지만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의식을 가진 존재이면서 사고와 감정을 가진 인간이란 존재는 물리학과 생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에겐 철학이라는 또 다른 학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과 생물학과 철학은 별도의 학문처럼 보이지만 이것들은 분명 연결되어 있다. 다만 우리들은 모두 각 영역의 전문가만 되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이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간다. 각 영역의 전문가가 되었지만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존재한다면 그 자는 인간으로서 궁극적으로 이해해야 할 철학의 영역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도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에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도 그랬던 것일까?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채 귀를 통해 들려오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와 그녀의 분명 1m의 간격을 두고 앉아 있었지만 그 물리적 거리는 점점 좁혀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시각적인 느낌과 청각적인 느낌의 복합적인 현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각보다는 청각에 점점 더 끌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녀의 눈 말고는 다른 어떤 곳으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전체적인 몸의 질량감에서 시작한 거시적인 시선은 팔다리와 손발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옮겨가고 얼굴 곳곳의 이목구비(耳目口鼻)를 훑고는 마지막 종착지인 그녀의 눈동자에서 멈추고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시선이 묶인 채 그녀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나의 심장의 박동 소리와 함께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본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나는 간헐적으로 시선을 멀리 그녀의 주변 배경으로 옮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그녀의 눈동자로 시선은 계속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는 마치 그녀와 같은 시공간에 머무는 듯한 일체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얼마 되지 않아 그녀 안으로 당겨지는 듯한 강한 끌림을 느꼈다. 우주의 광활한 진공의 세계를 떠돌던 두 개의 블랙홀이 만난 것이라 표현하면 적절할까?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정신의 일체감은 육체의 일체감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도 그랬던 것일까?

우리의 대화가 끝이 났을 때 우리는 0.5m로 가까워져 있었다.

- 자작 소설 중에서 발췌 -

끌리는 남녀


생물학적 시공간의 합일


나는 과학과 철학을 문학에 섞어 보았다. 위의 소설에서 시공간의 개념을 느낄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내가 위에 옮긴 소설(문학)에서 물리학과 생물학을 통해 인문학(철학)을 모두 인지했다면 당신은 이성과 감성의 연결이 아주 원활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질량을 가진 존재가 물리학적으로 시공간의 일치를 경험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시공간의 일치는 가능하다. 그건 생명을 가진 포유류의 생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컷과 암컷은 서로 다른 성 기관을 통해 시공간을 겹치는 경험을 통해 생명을 잉태한다. 자신의 그것과 이성의 그것이 점유하던 공간이 겹치게 되는 순간이다. 이건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겹친 것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서로 다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삽입한 성기는 삽입된 성기의 공간을 비집고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서로는 변화가 없다. 단지 겹쳐서 보이지 않아 같은 시공간에 놓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건 생물학적으로는 다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암컷과 수컷은 이렇게 서로의 공간을 겹치는 방식으로 연결과 융합의 과정을 거치며 생명을 잉태한다. 그리고 암수는 이런 끌림의 유혹을 통해 유전자를 남기고 생명을 존속시킨다.


인문학적 시공간의 합일


하지만 인간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인간은 단순히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이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런 육체적 합일을 통해 강한 일체감과 황홀감을 느낀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짝짓기의 계절이 정해져 있지 않고 지속적 이런 일체감과 황홀감을 느끼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적(생물학적) 합일은 정신적(인문학적) 합일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물리학과 생물학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앞에 옮긴 소설에서 남녀는 정신적인 합일의 과정을 거치고 난 후 서로 강렬한 육체적인 합일의 끌림을 느끼고 있다. 인간은 이 정신과 육체의 시공간이 완전히 겹치는 순간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런 순간을 기적 같은 사랑의 순간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아주 드물게 나타나며 이런 상대를 만나는 것을 기적과 같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잘 느끼지 못하는 이런 감동을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 속의 이야기를 보고 읽으며 대리 만족한다. 만약 조금 전 앞의 나의 발췌 소설을 읽고 잠시나마 당신이 이것을 간접 경험했다면 당신은 문학을 통해 그런 정신적 육체적 합일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다. 문학과 예술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현실은 너무도 각박해서 이런 합일을 느낄 시공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시공간의 합일 = 음악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자. 니체의 예술 미학인 [비극의 탄생]에서는 인간이 완전한 시공간 합일의 황홀경을 경험하는 것은 음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현실의 눈에 보이는 존재를 통한 정신적 육체적 합일을 통한 황홀감을 갈망하지만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고 이걸 경험한다고 해도 이것을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왜냐 인간은 반복되며 익숙해진 것에서는 더 이상 처음의 그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과의 시공간의 합일은 다시 분리된다. 분리와 합일이 여러 번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그 황홀경은 점점 사라져 간다. 이건 물리학적으로 완전한 합일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을 통한 슬픈 황홀경

“'슬픈 황홀경’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이고 학문적인 지성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음악에서는 그런 모순이 가능하다”


- 박찬국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중에서 -


하지만 우리는 가끔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곤 한다. 물론 감수성이 메마른 분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시리라. 하지만 우리는 음악에 심취해 눈물을 흘릴 때 알 수 없는 황홀경에 빠지곤 한다. 나도 여러 번 경험했다.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담긴 그 느낌을 글로 생생하게 재현하며 홀로 눈물 흘린 날이 많았다. 그리고 글이 마침표를 찍고 그 음악에서 빠져나왔을 때 알 수 없는 환희를 느끼곤 한다. 이것이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글이 노동이 아닌 환희의 창작활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 어떤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아도 글을 쓰는 것을 지속할 수 있다.


음악이 없다면 나는 글을 쓸 수 없다. 음악만이 나의 글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질량이 없다. 빛과 같다. 이 둘은 비록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우리에게 보이고 들리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을 경험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신)과 성령을 빛과 소리에 비유하는 것이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빛과 공기의 파동(소리)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없는 존재와 연결되고 그것을 느낀다.


“음악은 우주의 언어이다”

- 피타고라스 -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 음악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빛으로 세상을 보고 소리로 세상을 느낀다. 눈먼 사람이 세상을 더 예민하게 느끼는 건 그 때문 아니던가? 우리는 어쩌면 영원하지 않은 상대(대상)와의 시공간의 합일을 소리(음악)를 통해서 위로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음악에 도취되어 시간과 공간을 잊은 채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 소향 [바람의 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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