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김종원
“대작에는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대가들도 그런 욕심 때문에 고생을 한다. 나 역시도 그것 때문에 고생했고, 엄청난 시간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대작에 몰두하느라 수많은 작은 일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대작 하나만 포기했어도 나는 100권의 책은 더 썼을 것이다.”
- 요한 볼프강 괴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_김종원] 중에서 -
하나의 결과물을 위해 60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 괴테는 60년의 시간을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전념했다. 그리고 그 작품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고전이 되었다.
글이 삶이 되었다. 삶과 글이 꾸준히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몰아치듯 몇 시간 혹은 며칠 만에 완성해 내는 단편은 삶의 단면만을 담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단편은 금방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다. 하지만 장편은 다르다. 만약 그 글이 60년이라는 세월과 함께 해온 것이라면 그 글의 생명력도 그만큼 길어진다. 하나의 작품을 끊임없이 이어서 쓴다는 것은 또한 삶에서 순간순간 피어오르는 수많은 단상들을 놓칠 수 있다.
괴테는 아마 대작 때문에 많은 단상들을 놓쳤을 것이다. 큰 하나를 위해 작은 여럿을 포기했다. 삶은 큰 것(대작)을 위해 작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작은 것을 위해 큰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큰 것을 끝까지 완성해 내는 능력만큼 순간순간 작은 것들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괴테는 대작(희곡, 소설)으로 고전이 되었고 페소아는 단상(시, 산문)으로 고전이 되었다.
IQ(Intelligence Quotient)가 가장 높은 작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괴테를 따라갈 자가 없을 것이다. 그의 IQ는 220~240 정도로 추정된다. 그가 남긴 수많은 업적들이 그가 천재 작가임을 알려준다. 나는 아직 괴테의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세계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작품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괴테의 철학을 엿보다가 계속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페소아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괴테의 삶을 드려다 보니 페소아의 삶이 그와 대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랑의 태도
괴테와 페소아의 사랑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다수의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지만 한 가지 작품을 위해 평생을 바친 괴테 그리고 한 여자만을 사랑했지만 여러 가지 이명으로 엄청난 양의 단편 작품을 쓴 페소아, 괴테는 체험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고 상상하는 자였고 페소아는 생각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고 상상하는 자였다.
이 둘은 표현에서 차이가 있다. 체험을 통해 표현되는 글은 디테일이 살아있고 감각적이며 현실적이다. 반면 생각을 통한 사랑은 디테일은 덜할 수 있지만 직관적이며 몽환적이다. 전자는 제한적이고 후자는 무제한적이다.
경험에서 비롯된 사랑의 묘사는 자극적이라서 쉽게 빠져든다. 마치 카메라의 줌을 당겨가며 장면을 보는 것과 같다. 줌인(Zoom in)방식이다. 하지만 생각을 통한 사랑은 한 가지 단상(스틸샷)에서 시야가 멀어지면서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줌 아웃(Zoom out)이다.
전자는 리얼함 묘사이고 후자는 추상적 묘사이다. 이건 각각 체험과 생각을 통한 상상이 만들어내 결과이다. 전자는 여지를 좁혀가는 과정이고 후자는 여지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디테일한 장편 소설과 여백이 넓은 시와 같다. 상상의 영역은 언제나 여백에서 생겨난다. 전자는 작가가 의도한 비교적 상세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 정물화라면 후자는 대략의 정황과 분위기만 던져 주고 독자가 그 디테일을 상상해야 하는 추상화와 같다. 전자는 작가의 상상에 의존적이고 후자는 독자의 상상에 의존적이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건 나도 작가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디테일을 상상하는 능력이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인물과의 단편적인 사건 단편적이지만 인상적인 장면 하나에서 스토리를 만들고 디테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작가 특히 소설가의 역량을 좌우한다. 만약 작가가 아닌 독자의 영역에만 머무는 자라라면 굳이 후자의 능력은 필요 없다. 독서의 흥미와 묘미에 빠져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 작가라는 가이드를 따라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가이드가 없는 자유여행을 좋아한다.
독일과 러시아 대문호의 공통점
괴테는 사랑에 있어서 아주 솔직한 남자였다. 나이를 불문하고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면 주저하지 않고 해당 여성에게 다가가는 자였다. 물론 그 태도는 진실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을 진정성 있는 글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다수의 여성과의 다양한 사랑 경험이 자칫 IQ 240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기만 할 것 같은 글에 감성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그의 체험 특히 여러 여성들과의 사랑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선천적으로 IQ도 높은 데다가 여성들과의 감성 교류로 후천적인 EQ(Emotion Quotient)의 향상까지 이뤄낸 괴테는 독일 최고의 문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그와 비견되는 러시아 대문호인데… 둘 다 여성과의 사랑 경험이 아주 풍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로맨스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건 우리가 좀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상황 속에서 이성과의 사랑을 대리만족 혹은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괴테와 톨스토이가 독일과 러시아의 대중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포르투갈의 대문호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붙어있는 국가임에도 아주 다른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 스페인이 정열적이고 외향적인 느낌이라면 포르투갈은 서정적이고 내향적인 정서를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포르투갈의 대문호는 리스본이라는 자신의 고향에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서정적이고 철학적인 시와 산문을 남겼다. 사랑 또한 현실의 단 하나의 사랑으로 모든 수많은 사랑을 꽃피웠다. 그건 그가 생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페소아는 괴테나 톨스토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다. 포르투갈의 인구(약 1000만 명)만큼 독자도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문학이 결코 괴테나 톨스토이에 뒤지지 않는 것은 나 같은 독자이면서 작가인 자에게는 그가 더 많은 영감과 통찰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경험주의 작가 보다 추상주의 작가가 작가에게 울타리가 없는 무궁한 상상의 길을 열어준다.
쾌락적인 독서(야사, 웹소설, 만화, 성인소설 등)는 작가에겐 해롭다. 물론 독자들에게도 그리 좋지 않다. 그건 여지없이 작가의 의도대로만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업적인 글은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야 사람(구독자)이 모이고 돈이 된다. 그런 작품이 다른 여러 콘텐츠로 전환되고 확장 가능하다. 디테일할수록 그림(만화)과 영상(영화 혹은 드라마)으로 제작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괴테나 톨스토이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작품은 2차 콘텐츠로 제작할 수 있지만 페소아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철학적 사색과 추상적인 상상을 원하는 자에게는 페소아가 적격이다. 그는 철학자과 소설가 사이에 있는 시인과 같다.
나는 호주에 머물 때 공원에서 자주 그의 글을 읽으면서 산책하고 사색하고 상상했다. 그의 글은 나를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는 끈 풀린 느슨한 길잡이와 같았다. 양 옆이 막힌 통로가 아닌 무릎까지만 올라오는 낮은 울타리 그것도 이곳저곳이 부서져서 언제라도 울타리 밖으로 넘어갔다고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페소아의 글을 접한 이후부터 나의 글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분야를 넘나들며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점점 강한 믿음으로 바뀌면서 분야가 다른 글 속에서 공통점과 연결점을 찾아내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페소아의 글도 그렇다. 분야를 넘나들지만 그것이 과학적 증명이 아닌 추론적 혹은 변증적 때로는 추상적 그리고 직관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철학자와 문학가 사이
나는 철학과 문학에 모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유명한 철학자가 유명한 문학가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고전 문학 작품에는 모두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그래서 문학과 철학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카뮈나 니체 같은 문학가와 철학자는 이 둘 사이를 오고 갔다. 하지만 둘 다에 능통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 문학가는 철학자처럼 자신들의 생각을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문장으로 철학서를 쓰지는 않는다. 나는 그게 참 궁금했다. 왜 그럴까?
문학가(文學家)는 끝에 집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집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글로서 이미지를 만들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 문학가가 하는 역할이다. 작가(作家)가 집을 만드는 의미를 가진 직업이라고 얼마 전에 쓴 에세이 (목수와 작가 사이)에서 말했었다. 철학자(哲學者)는 보이게 할 수 없다. 철학은 머릿속에 개념을 떠올리게 하고 연결시키는 것이지 문학처럼 이미지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뇌(전두엽)에서 그림과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글이 뇌(???)에서 글로서 다른 글들과 연결되어 로드맵을 만드는 것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문학을 더 갈망하지만 내가 더 잘하는 것은 사실 철학인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글이 이런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글이다. 하지만 언제나 문학적인 상상에 목말라한다. 인물과 사건이 있는 이미지가 연결되고 이어지는 장편의 스토리를 꿈꾼다. 하지만 머릿속에 수시로 떠오르는 철학적인 단상들이 그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언제나 글이 계속 다른 글을 만들어 내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글을 쓰게 된다.
과거 누군가를 사랑하던 시절에는 그 반대였다. 내가 사랑의 느낌에 빠져있을 때는 글이 아닌 이미지가 연결된다. 그때 폭풍처럼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험을 했다. 아마 괴테와 톨스토이가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언제나 사랑을 이야기한다. 철학은 사랑 없이도 할 말이 많지만 문학은 사랑을 빼버리면 껍데기만 남는다. 내가 이렇게 철학적인 에세이를 쓰면서도 계속 문학적인 이야기를 꿈꾸는 것은 아마도 사랑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꿈꾸는가? 철학인가 문학인가?
만약 문학이라면… 괴테인가 페소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