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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과 사랑 사이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에스터 페렐

by 글짓는 목수

“불륜을 정의하는 건 사람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사람을 정의하기도 한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 하지 않는 것] 중에서 –


각자 자신의 마음대로 불륜을 정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왜냐 불륜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법률적 정의가 존재하며 사회가 바라보는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건 다수의 사람들이 약속한 사회적 정의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이 이 보편적 정의를 인정하지만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이 정의를 부정한다. 다만 드러내놓고 부정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태도이다. 그들도 사회적 혹은 법률적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가진 개인적인 정의를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회(공동체)가 정의하고 약속한 것과 내(개인)가 생각하고 느끼고 것과의 괴리를 느끼며 사는 곳이 인간 세상이다. 사회가 추구하는 것과 개인이 추구하는 것이 부딪친다면 음지에 숨어서 추구할 수밖에 없다. 불륜과 외도가 숨어서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젠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구속할 수 없는 시대이다. 자신에게 안식과 위안 그리고 삶의 기쁨을 되찾게 해 준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욕망과 권태 사이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불륜과 외도는 이제 필요악이 된 것일까...



[우사이것] 독서 토론

드러내기 쉽지 않은 주제 : 불륜과 외도


독서 토론 모임을 통해 접하게 된 책이다. 독서 모임을 나가면서 생긴 현상 중 하나는 내가 즐겨 읽지 않던 혹은 관심 밖에 있던 주제의 책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은밀하게 홀로 어딘가에 숨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드러내 놓고 얘기하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


- 불륜: 일반적으로 감정적, 육체적 배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

- 외도: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부정행위 (주로 성적인 관계)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사랑도 불륜도 모두 사전적인 정의와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한다. 사랑은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그 사랑의 표현과 행위와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러브 스토리의 형태는 너무도 다양하다. 본질은 같아도 드러나 보이는 모습은 각양각색일 수 있다. 사랑의 당사자들만 알 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은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가진다. 누군가에겐 불륜으로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불륜이 사랑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단편적으로 보면 대부분은 불륜이고 선후좌우 맥락을 가진 스토리를 다 보게 되면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다 아는 사람은 오직 당사자 둘밖에 없어서 내로남불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모든 과정을 다 관찰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해진다. 그래서 불륜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건 사랑이 엮여있기 때문이다.


“모순적 이게도 많은 이가 결혼생활을 지키기 위해 결혼 생활 밖으로 눈을 돌린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결혼할 시기에 누군가가 다가왔어요. 친구들이 하나둘씩 경쟁하듯 결혼식을 올렸죠. 나 또한 그 경쟁에서 뒤질 수 없더라고요. 제가 승부욕이 좀 강한 편이거든요. 그리고 또 경쟁 사회잖아요. 그 사람과는 결혼을 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끊임없이 나를 찾았고 잘해줬죠. 그렇게 그가 나의 삶의 영역으로 조금씩 들어왔어요. 그는 결혼을 위한 현실적인 조건들을 갖추었어요. 집과 차와 안정된 직업 모두. 그 어떤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결혼을 했던 것 같아요. 남들과 같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고 바쁘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나와 그가 아닌 엄마와 아빠로서의 삶을 살면서 나와 그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죠.


‘누구 아빠’, ‘누구 엄마’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나를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로 봐주는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결혼 생활 동안 죽어 있던 내가 깨어났어요. 마치 봉인되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거 같았죠.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나는 상자 안에 남은 희망이 보였어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었어요. 삶이 새롭게 느껴지더라고요. 20대의 대학생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야 했죠. 그런데 기분이 좋아서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의 역할을 즐겁게 해내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남편과의 잠자리도 해야 했죠. 그건 조금 싫더라고요 하지만 부부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잖아요. 마치 불륜의 사랑이 결혼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거 같았어요”


- [자작 소설] 중에서 발췌 -




책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짧은 남녀의 사례들이 있다. 미혼인 나에겐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또한 아주 흥미로웠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 혹은 경험하기 어려운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독서 아니겠는가. 글감이 풍부해지고 마르지 않는 것은 모두 독서의 샘물 효과이다.


“다 돈 때문이에요. 부부가 헤어지면 곤란한 너무 많은 경제적인 이유들이 있죠”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한 분이 한 얘기가 뇌리에 떠올랐다. 부부는 사랑 공동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은 사랑 공동체에서 경제 공동체로 그 성격이 바뀌는 것이 결혼이라고 말했다.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이 사랑이었을 수는 있지만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돈(물질)이라는 것이었다. 주택담보대출, 자녀의 각종 학원비, 분할할 수 없는 수많은 재산과 소유물들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보통 어중간하게 가진 자들이 이런 고민들 때문에 책임과 의무 그리고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갈등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런 스릴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래된 부부는 사라진 사랑의 감정을 다시 살리기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많은 실망과 상처 그리고 아픔을 남겼다. 부부가 서로를 통해 더 이상 도파민과 세로토닌 분비를 일으킬 수가 없다. 그 상황을 개선하고 회복하는 것이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이다.


사랑과 욕망의 관계


사랑이 욕망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건 어쩌면 사랑이 주는 쾌락에만 집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면 순수해지지만 욕망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 욕망은 내가 가지지 못한 새로운 것과 더 즐겁고 더 맛있고 좀 더 흥분되는 것에 생기는 감정이다. 사랑도 가질 수 있는 소유물처럼 욕망하는 것은 아닐까?


욕망이 배제된 사랑은 욕망으로 들끓는 물질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 원하는 자유는 욕망추구에 가깝다. 쉽고 자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세상이 그렇게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인류는 언제나 좀 더 쉽고 편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상을 취하려 하기 마련이다. 산업물질문명의 발전이다. 사랑도 그것에서 예외일 수 없다. 웃긴 사실은 그런 시스템을 가진 국가는 그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단위인 가정을 뒤흔든다는 모순을 가진다.


“많은 커플에게 외도에 관한 논의는 다음 다섯 글자로 요약된다. ‘잡히면 죽어!’”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불륜’이 음지에서 생육하는 이유이다. 마치 이끼나 고사리처럼 음지에서 살아가는 포자식물(선태, 양치)과 같다. 전체 식물의 약 10% 정도를 차지한다. (남녀 사랑의 약 10%가 불륜이라서 그럴까?) 그늘진 어둠 속을 좋아하는 식물들이다. - 에세이 [나는 소나무다] 참조 -

짙은 선팅 안에서

그들은 빛이 강한 곳(직사광선 아래)에서는 살 수 없다. 그렇다고 빛이 없이도 살 수 없다. 빛이 약한(간접광) 빛이 만든 그늘 아래에서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들은 그늘에서 더 큰 안식과 위로를 받으며 생기를 얻는다.


어둠 속 남녀


한국에 자동차들은 유난히 선팅이 짙다. 대낮에도 차 안을 드려다 볼 수 없다. 호주에서 오랜 시간 있어서 인지 이렇게 선팅이 짙은 차들이 낯설다. 호주는 불법이다. 호주는 운전자와 운전자 간 그리고 운전자와 보행자 간 눈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서로 시선을 보고 의사를 파악하는 것이다. 한국은 오로지 차의 외관에 깜빡이(방향지시등)와 차의 움직임으로만 운전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그 안에는 음지를 좋아하는 커플이 있다. 자신을 가리기 위한 공간은 불륜을 위한 필수 아이템이다.


개인주의가 강한 사회일수록 이런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많다. 전 세계 어딜 가도 한국의 모텔처럼 잘 갖춰진 숙소는 없다. 모텔 비즈니스는 생리대와 비아그라처럼 망하지 않는 사업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생리 현상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는 망할 수 없다. 한국은 공동체의 유지를 아주 중시하면서 개인의 자유도 몹시 중시하는 이중적인 모순을 보인다. 그래서 극렬하게 대립한다. 양극화 체험에 한국만 한 나라가 없다.


“남자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지루함 때문에 바람을 피우고, 여자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망과 외로움 때문에 바람을 피운다”


- 에스터 레펠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저자의 남녀의 불륜의 동기가 인상적이다. 예전에 알랭드 보통의 [인생학교- 섹스 편]을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숨어서 하는 이야기] 참조, 그 책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우리는 가족과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건 근친상간이다. 알랭 드 보통은 가장 친밀한 관계인 가족과는 가장 친밀한 행위인 섹스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남다른 해석을 했다. 결혼한 남녀는 피를 나누지 않은 연인이기에 섹스가 가능하다. 그런데 결혼 전에는 그토록 갈망하던 섹스는 결혼 후 서서히 소원해져 간다. 이제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혼전순결을 강조한 것일까? 좀 더 오래도록 연인같은 부부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서로 다른 남녀가 가족이 되고 자녀가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섹스가 욕망이 아닌 책임과 의무의 행위로 바뀌어 버리면서 그것을 두렵고 지루하게 느끼게 된다. 더욱이 직장과 가사에서 받은 책임과 의무까지 더해져서 침대 위에서 더 많은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부부관계를 악화시킨다. 남성은 직장과 사회에서 받은 압박과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안식과 위로의 관계를 꿈꾸게 된다. 반대로 여자는 그렇게 의무적으로 대하는 배우자로부터 외로움과 분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남녀가 서로 다른 이유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서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결혼이 만든 책임과 가정이 쥐어준 의무 때문에서 둘 사이를 이어준 사랑이 사라진다. 그래서 서로는 또 다른 모습의 사랑을 꿈꾸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불륜의 사랑이다.


빛(양지)의 사랑이 끝나면 어둠(음지)의 사랑이 시작된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in Dongnae

글짓는 목수 (유튜브 계정)

https://youtu.be/1w_FIHbj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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